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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궤의 재현향촌사회의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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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촌사회의 조직

조선후기의 양반은 그 구성이 크게 세 부류로 이루어졌다. 16세기말까지 형성된 원래의 양반에 준하는 양반과 주로 17,18세기에 이들에 편입된 중간신분층 출신의 양반, 그리고 주로 18,19세기에 편입된 평민 또는 천인출신의 양반이 그들이었다. 따라서 이들 양반은 직역상 같은 양반이기는 했어도 역사적으로나 사회통념상으로 같은 양반일 수가 없었다. 주로 품관, 사족들로 구성된 원래 의미의 양반과 그 밖의 다른 양반 간에, 또 이들 중에서도 양반서얼을 비롯한 중간신분층 출신의 양반과 기타 평민출신의 양반간에 일정한 차별화가 이루어져 간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16세기 이래 사족들은 향촌사회의 부세운영과 향임층에 대한 인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고 향규, 향약 등의 향촌규약을 만들어 향리와 일반민들을 그들의 지배 하에 수렴할 수 있었다. 이같은 사족들의 자율적인 향촌지배구조를 향안질서라고 부르는데, 향안이 바로 이들 주도적인 향촌 사족들의 대표적인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향안에 이름을 올린 사족들은 향회로 대표되는 합의체적 향촌권력기구를 통해 유향소의 좌수, 별감 등 향임을 선출, 통제하였고 자체 규약인 향규를 만들어 하층민들을 통제하고 위로는 관권과 일정하게 타협하면서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렇게 사족이 매개가 되는 지방통치의 방식은 봉건정부의 당시 입장과도 일정하게 상호보완의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즉, 국가권력으로서도 지방지배에 있어 공동체적 질서와 물적 토대가 확고했던 재지사족의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한국사 34-조선후기의 사회 (국사편찬위원회, 1995), 조선시기 촌락사회사 (이해준,민족문화사,1996)

향약

향약은 고을의 백성전체를 화목하게 하고, 자치적으로 교화(敎化)하기 위한 약속으로, 순수한 의미의 향약은 주로 17세기 이후부터 행하여졌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1670년대 중반 이전까지 '향약'으로만 불려지던 향촌자치규약들은 시기와 내용적 특성에 따라 달리 불려지게 되었다. '조선적 향약'으로 '향약'으로만 일컬어지던 조선 초기의 규약들은 대부분 '향약'이 아닌 '향규'로 볼 수 있다. 이 '향규'는 향촌자치법규적 성격이 강한 것으로 조선 초기 향헌(鄕憲)이나 향규 같은 명칭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는 향소(鄕所)나 향임원(鄕任員), 향임(鄕任)에 나아갈 수 있는 향사족(鄕士族)들의 불법패리(不法悖理)를 규찰하기 위한 규식(規式)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향약은 초기의 향규를 현실에 맞게 발전시켜가는 과정에서 향규약을 성립시키는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향규약이나 향약의 실시범위가 좁혀지면서 향민전체를 화목하게 하고, 자치적으로 교화하기 위한 약속은 향촌사족들이 중심이 되어 실시하게 된다. 여기에다 경재소(京在所)가 없어지게 된 이후부터는 각 고을의 수령들이 강력하게 지원하거나 직접 시행해 나가기도 하였다. 우리나라는 중국 북송대(12세기 전반)의 남전여씨향약(藍田呂氏鄕約)이 《소학》에 실려 16세기 이후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향약시행을 강력히 실천하고자 했던 조광조(1428∼1519) 등 기묘명현들이 죽자 중단되고 말았다. 그 뒤 이의 보급, 실시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었으나 16세기까지는 국가에서 더 이상 정책적으로 추진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17세기로 오면 우리 실정에 알맞게 첨삭을 가한 향약이 향사(鄕士)들에 의해 정해져서 수령들의 권장으로 각 지방에 보급, 실시되었다.
결국 종래 '조선적 향약'이라 보았던 그들 자료들을 용어는 뒤섞여 붙여져 있더라도 그 자료들을 성격별, 유형별로 분류 정리하여 보면 '향규'는 조선왕조 초중기에, '향규약'은 중후기에, '향약'들은 후기와 말기에 많이 실시되었음을 알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향규, 향규약, 향약 등이 시기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긴 세월 계기적으로 변화되어 갔음을 살필 수 있다.

참고문헌 : 한국사 34-조선후기의 사회 (국사편찬위원회, 1995), 조선시기 촌락사회사 (이해준,민족문화사,1996)

동약(洞約)

17세기 이후 향약은 각 지방 수령들의 권고나 승인 아래 실시되지만 범위가 축소되는 동약(洞約)이나 이약(里約)의 경우는 모든 주민을 대상으로 하여 좋은 예의 풍속을 보급시키려는 자치적, 교화적(敎化的) 성격이 컸다. 그 특징으로는 대개 향약의 4대강목(四大綱目)인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로 나누어 여러 절목(節目)이 세워져 있으며, 향안도 상하합계형식으로 되어 전체 고장사람들을 교화하려 하였다. 또 약속규정을 어긴 자에 대한 벌칙도 향헌이나 향규에 비해 많이 완화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다.

참고문헌 : 한국사 34 -조선후기의 사회 (국사편찬위원회, 1995), 조선시기 촌락사회사 (이해준, 민족문화사, 1996)

향약계(鄕約契)

18세기로 내려오면 수령들이나 관아의 간섭을 비교적 적게 받으면서 재지사족(在地士族)들이 자체적으로 촌락주민들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 동(洞)을 단위로 아래 자연촌락 몇 개를 계조직으로 결합시켜 향약계를 상하합계 형식으로 만들었다. 이리하여 주군현단위에서 일어나는 하층민들의 저항운동이나 향안(鄕案) 파기(破棄) 현상을 실질적으로 막기 위해 자신의 신분을 지킬 것을 강조하기도 하고, 형벌권을 통해 하층민들을 위협하기도 하였다. 또 하층 약원(約員)이 어려움에 빠졌을 때 상층의 약원들이 구휼하고 위로도 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동약원으로 상하가 협력하는 바람직한 동약계(洞約契)도 많았다. 그러나 18세기 말에서 19세기로 넘어오면 하층민들의 저항도 크게 일어나지만 상층 향사족(鄕士族)들이 수령들의 비호 아래 용형권(用刑權)을 남용하자 민란을 촉발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향약계의 폐단을 여러 곳에서 목격한 실학자 정약용은 "향약의 폐는 도적보다 심하다"고 비판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사 34-조선후기의 사회 (국사편찬위원회, 1995), 조선시기 촌락사회사 (이해준,민족문화사,1996)

보은향약(報恩鄕約)

18세기 중, 후반 영정조(英正祖) 연간 수령이 주도한 향약으로 영조 23년(1747)에 군수 김홍득이 만들어 실시한 충청도 보은향약(報恩鄕約)이 있다. 이 향약에서는 군수가 도집강(都執綱)이 되어 향약을 총괄하였고, 임원으로는 도계장 1인, 부계장 1인을 두어 향사족들에게 맡겼다. 각 면에는 계장(契長) 1인을 향교의 유생들 중에서 택하도록 하였고, 예장(禮長) 1인은 향교의 장인 도유사(都有司)가 겸임케 하였다. 보은향약은 이보다 앞서 향사족들이 중심이 되어 그들의 자치기구인 유향소를 통해 실시하였던 것에 비해, 그 고을 향교조직을 이용한 점이 특징이다. 또 이들 수령들이 주도하는 주, 군, 현단위 향약은 수령이 교체될 때 계속 신임 수령들의 승인을 받지 못하면 중단되어 버리는 경향이 많았다.

참고문헌 : http://koreanhistory.or.kr

향규

향규는 이성계(1335∼1408)가 지은 함흥향헌(일명 풍패향헌)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이 외에도 경북 안동군 병산서원에 전해오던 향소규찰조(鄕所糾察條)나 《향헌》에 실린 유향소작폐금방절목(留鄕所作弊禁防節目) 등도 이에 해당된다. 이어 조선 초기부터 전해오던 향규를 기본으로 하여 이를 보급, 실시하려는 향안조직(鄕案組織)과 연계시킨 것이 향규약(鄕規約)이다. 이는 향원(鄕員)들 자치조직의 규약으로 향촌 자치단체규약적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향규약은 향안조직이 전제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즉, 이름난 사대부나 그 지방의 선비출신들이 규약을 자치적으로 정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은 바로 협정적(協定的)인 향안조직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17세기에 들어서면 사족(士族)이 아닌 향족(鄕族)들도 향안에 오르고 있고, 19세기가 되면 부유한 평민들도 향안에 오르는 등 각계 신분층이 각 지방마다 뒤섞여 나타나고 있다. 또 향규약의 실시범위도 15∼16세기에는 주, 군, 현(州郡縣)단위에 많았으나 17세기 이후로 오면 면(面), 사(社), 동(洞)단위로 그 범위가 좁혀지는 경향이 많다.

참고문헌 : 한국사 34 -조선후기의 사회 (국사편찬위원회, 1995), 조선시기 촌락사회사 (이해준, 민족문화사, 1996)

향규약

향규약은 향약, 동약, 향립약조(鄕立約條), 일향약속(一鄕約束) 등으로 그 명칭이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공통적인 특징은 향사족조직이나 향원조직이 전제된다는 점이다. 15세기 중엽 전라도 광주 일원에 실시된 광주향약조목이 그 대표적인 향규약이다. 1475년 정극인(1401∼1481)에 의해 실시되기 시작한 태인(泰仁)의 고현동약(古縣洞約)은 현재까지도 계승, 발전되어 오고 있다. 현재도 그곳 동각(洞閣)에는 여러 대에 걸쳐 첨삭된 규약들과 동안(洞案)이 전해오고 있고, 그 영향은 칠보면 일대까지 미치고 있다. 또 이황(1501∼1570)의 향립약조(鄕立約條)는 예안현과 안동부는 물론 영남 각 고을 향규약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이(1536∼1584)의 해주향약이나 해주일향약속은 해주의 석담과 해주목(海州牧) 일원의 향촌선비들 자치규약으로 조선 후기 근기(近畿), 호서지방의 향규약과 향약설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이이가 정한 사창계약속(社倉契約束)은 사창과 촌계(村契)와 향약이 결합된 것으로 17세기의 향규약이나 향약의 실시 범위가 축소되면서 신분적으로 상하합계(上下合契)형식의 동약계나 촌계성립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참고문헌 : 한국사 34 -조선후기의 사회 (국사편찬위원회, 1995), 조선시기 촌락사회사 (이해준, 민족문화사, 1996)

향교

향교는 고려와 조선왕조의 집권적 구조 위에서 전개된 것으로 군현제와 함께 옹조의 수도가 아닌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하기 위하여 설립된 관학교육기관이다. 향교의 연원은 유교문화이념이 소개되는 역사단계에서부터 있어온 것으로 추론되고 있지만, 향교가 적극적으로 설립되고 운영되어진 것은 숭유억불(崇儒抑佛)과 유교문화이념을 정치이념으로 표방하고 있는 조선왕조부터였다.
조선왕조는 정치이념으로 유교문화이념을 수용함과 동시에 군현제(郡縣制)의 개편을 통하여 지방사회 질서 내용을 유교문화 논리에 접목시키려는 정치적 노력을 하였다. 그리고 과거제 운영을 유교교육과 연계시킴으로써 조선 양반관료정치를 구현하려고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사대부들의 생활규범서인 '소학'과 '가례'를 조선 초기부터 교생들에게 권장하고, 또 여러가지 고강(考講)이나 과거의 시험과목으로 부과하기도 하였다.
조선왕조는 이를 위한 정치적 지원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지방 수령들의 향교에 대한 적극적 관심과 보호, 육성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정책적으로 향교를 통해서 그 교육적 기능과 문화적 기능을 확대 강화하고 있었다.

참고문헌 : 한국사 34 -조선후기의 사회 (국사편찬위원회, 1995), 조선시기 촌락사회사 (이해준, 민족문화사, 1996)

교육적 기능

향교의 교육적 기능은 조선왕조에서의 확대된 공간적 범위에서 유학 교육의 기회를 넓혔다는 것이다. 중앙정부는 이를 위해서 유학의 소양이 있는 지식인으로 교육할 수 있는 인재를 교관으로 삼고, 이 교관을 수령과 함께 파견하도록 법제화하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교관을 교수(敎授, 종6품), 훈도(訓導, 종9품)로 구분하여 군(郡), 현(縣)에는 훈도를, 부(府), 목(牧) 이상은 교수를 파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갑자기 외관(外官) 요원의 하나인 교관의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조선 초기부터 활성화될 수는 없었다. 초기 이래 중앙정부는 교관의 보충을 위해서 여건상 불리함을 감수하면서도 교관의 파견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것은 왕조의 정치이념과 동일한 제도상의 정치력을 유지하려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중, 후기에 가면서 관학 교육기관에 대한 비판적 언론과 사학 교육기관의 활성화로 향교 교육 기능에 대한 회의 또한 있었으나 중앙정부는 제독관(提督官), 교양관(敎養官)을 두어 관학의 교육 기능의 부활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각 지방마다 갖는 전통과 인구 구성에서의 특성 때문에 그 결과는 부분적 성과에 그쳤다.

참고문헌 : 한국사 34 -조선후기의 사회 (국사편찬위원회, 1995), 조선시기 촌락사회사 (이해준, 민족문화사, 1996)

교육대상

향교는 유교문화이념에 따른 질서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교육기관으로 그 교육 대상은 양인 전체였다. 다만 조선사회의 신분제 사회라는 전통적 사회질서 안에서 상류신분층은 보다 많은 기회를 독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향교는 지방에 널리 분포되어 있었으므로 중앙의 소수 양반만이 전담하는 배타적 속성에서 벗어나 보다 많은 양인신분층에게 유학교육의 기회를 부여하였다. 향시의 합격예정자수와 향교정원을 비교해 보면, 서울의 4부학당 정원 400명에 생원, 진사초시 합격예정인원 400명은 100% 합격을 보이고 있는 반면에, 각도 향시의 경우는 7%내외의 저조한 합격률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기층신분인 평민에게 교육기회를 부여함으로써 일정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으로, 양인들은 이를 통해 신분 상승의 사회적 변화를 추구하기도 하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16세 이상 양인에게 학업의 기회를 허락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문헌 : 한국사 34 -조선후기의 사회 (국사편찬위원회, 1995), 조선시기 촌락사회사 (이해준, 민족문화사, 1996)

신분적 특권

향교 학생의 정원은 목, 부, 군, 현단위에 따라 90, 70, 50, 30명 등으로 전국적인 통합 수는 15,330명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일단 향교의 정원이 갖는 의미는 향교의 교생이 되면 국가가 베푸는 특전이 부여된다는 것이다. 즉 군역이 면제된다든지, 학업성적이 우수한 경우 생원, 진사시험 회시(會試)에 직접 응시하게 하거나, 고강에서 우수한 사람은 호역(戶役)을 면제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 등이다. 조선시대에서도 학업의 시작은 7∼8세부터 였으나 16세부터 정액(定額)의 제한을 받도록 규제된 것은 바로 군액의 대상이 되는 연령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늦게까지 향교 교생의 신분을 유지하여 사회신분으로 대치함으로써 호적(戶籍)에까지 교생(校生)이라는 신분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사 34 -조선후기의 사회 (국사편찬위원회, 1995), 조선시기 촌락사회사 (이해준, 민족문화사, 1996)

문화적 기능

향교는 지방에서 지식인들의 구심처가 되고 있다. 이 때문에 지방 단위의 문화 행사, 특히 유교문화이념에 따른 행사, 춘추의 석전례(釋奠禮)와 삭망의 분향, 사직제, 성황제, 기우제, 여제 등이 향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조선 중기 이후 유행되고 있었던 향약의 운영이나, 그 밖에 향사례(鄕射禮), 향음례(鄕飮禮), 양로례(養老禮) 등도 향교가 집행하고 있었다. 향교는 지방 지식인들의 집합소 이외에 중앙정부의 정치적 의지의 구현처로서 왕의 윤음을 비롯한 중대한 정치적 내용이 직접 지방민들에게 전달되는 공식적인 장소가 되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오히려 순수한 교육적 기능의 상실과는 별도로 향교의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기능이 그대로 상존하는 것으로 인해서 교육적 기능을 소생시키려는 노력과 시도가 있었다. 이를테면 양사재(養士齋), 흥학재(興學齋), 육영재(育英齋) 등 향교의 부속건물 기구를 두면서 교육 기능을 활성화시키려는 부분적 노력이 있었다.

참고문헌 : 한국사 34 -조선후기의 사회 (국사편찬위원회, 1995), 조선시기 촌락사회사 (이해준, 민족문화사, 1996)

정치적 기능

향교는 중앙정치력과 지방사족들의 자연스런 만남의 장소이자 정치력의 구현 장소라는 점에서 정치적 구심처가 되고 있었다. 우선 중앙정치력의 지방침투를 위한 재정 기반의 양태는, 이른바 주, 부에 학전(學田 ) 7결, 학노(學奴) 30∼20명과 군, 현에 학전 5결, 학노 10명이라는 법제적 조처였다. 향교 운영을 위한 재정적 투자 이외도 지방 수령들의 전곡(錢穀) 기부나 지방 유림들의 유전(儒錢) 갹출, 일반 인민들의 원납전 징수 등이 있었다.
지방에서의 향교 건립과 보수에 대한 막대한 재정투자는 지방 정치력의 구현 기준이 되는 것으로, 이와 같은 재정 투자 이면에는 이에 상응하는 정치적 반대급부, 즉 조세 또는 군역 부담 등에서 일정한 혜택이 있었다.
지방 지식인들은 향교의 운영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향교를 통한 합법적인 면역과 지방정치에서 구현되는 정치력의 구심 세력이 될 수 있었다. 즉 조선 후기가 되면 이들은 향교의 운영을 위해 고강을 면제받으면서 학생신분을 유지하는 증명서인 면강첩을 발매한다든지, 교촌(校村), 교보(校保)라는 향교 주변 마을을 향교만을 위하여 국가의 일반 역에서 제외시켜 사역을 하도록 조처하기도 하였다.
이같은 재정투자를 통한 사회적 영향력의 행사는 그대로 정치적인 영향력을 나타내고 있어, 기왕의 향청(鄕廳) 중심의 정치력이 조선 후기에 와서는 향교를 중심으로 집결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향교의 교임(校任) 등도 그 지방의 지식인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는 유림의 대표자로 선출되고 있었다.

참고문헌 : 한국사 34 -조선후기의 사회 (국사편찬위원회, 1995), 조선시기 촌락사회사 (이해준, 민족문화사, 1996)

계의 성행과 발전

계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사회제도이고, 조직형태이다. 그동안 계는 전근대사회에서 성행했던 조직형태라는 점 때문에 흔히 '공동체'로 규정되어 왔지만 최근에는 조직구조적 특성에서 볼 때 공동체라기보다는 오히려 결사체적인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조선후기에 들어오면서 계는 종류도 다양해지고 계원들의 범위도 크게 확장되며 절대수에 있어서도 크게 증가되어 상당히 큰 변화를 겪게 된다. 그리고 재향사족들은 농민들의 촌락조직인 향도류의 조직(下契)을 사족들의 동계조직(上契)과 통합하여 갔다. 이는 기층농민을 수령권의 통제로부터 방어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뒤이어 전개된 촌락의 성장, 부세의 공동납제 확대, 교환경제체제의 발달 등은 농민의 의식을 성장시키면서 농민들로 하여금 '두레'의 강화와 다양한 촌계들을 조직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들은 점차 동계를 대신하여 촌락의 운영을 주도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한국사 34 -조선후기의 사회 (국사편찬위원회, 1995), 조선시기 촌락사회사 (이해준, 민족문화사, 1996)

종류

계의 종류는 무수히 많으나 목적, 형태, 기능 등을 기준으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① 생산, 식리, 공동구매 등을 목적으로 하는 경제적 집단 : 농계(農契), 보계(洑契), 식리계, 구우계(購牛契)
② 동리의 공공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정치적 집단 : 동계(洞契), 보안계(保安契)
③ 계원의 복리 및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복지 집단 : 혼상계(婚喪契), 혼구계(婚具契)
④ 조상의 제사 혹은 동제를 목적으로 하는 종교적 집단 : 종계(宗契), 문중계, 동제계
⑤ 계원 자제의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적 집단 : 학계(學契), 서당계
⑥ 계원의 친목과 오락 등을 목적으로 하는 친목 오락 집단 : 시계(詩契), 문우계(文友契), 동갑계, 유산계(遊山契) 등이 있었다.

참고문헌 : 한국사 34 -조선후기의 사회 (국사편찬위원회, 1995), 조선시기 촌락사회사 (이해준, 민족문화사, 1996)

규약과 조직

조선시대 각종 계의 규약을 기록한 계첩(契帖)을 보면 크게 서(序), 입의(立議), 좌목(座目), 발(跋)로 구성되어 있다. 서는 완의(完議)라고도 하는데, 계를 설립한 유래, 목적, 역사, 효과 등을 적었다. 입의는 절목(節目), 계헌(契憲), 범례, 조약, 규약 등으로도 불렸는데, 준수해야 할 항목들을 나열한 것이다. 여기에는 감독 규정, 임원의 선출, 임원에 대한 예우 등이 포함되기도 하였다. 좌목은 계원의 명부로서 계원의 신분이 양반인 경우에는 생년의 간지, 호, 본관 등을 기재한다. 이 밖에도 계첩에는 계 재산의 수지(收支), 재산목록과 소유전답 등의 기록이 있는 것도 있다. 민족항일기 이후에는 계의 규약이 장(章), 조(條)로 나누어지는데, 내용을 상세히 규정하는 등 근대적인 회칙 내지 정관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현대의 계의 규약도 이와 비슷하다.
계의 성원은 최하 2명에서 최고 수백명까지 범위가 매우 넓었다. 대체로 상계, 동계, 학계 등은 구성원수가 많지만 상호부조나 금융을 목적으로 하는 계는 구성원수가 적다. 구성원수는 한정, 불변인 경우와 유동적인 경우로 나누어진다. 상계(喪契)나 교유계는 계원수를 한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계의 임원으로는 계장, 유사, 도가(都家), 장재(掌財), 서기 등이 있었다. 계장은 계를 대표하여 내외의 업무에 책임을 지고 있었다. 계의 성원 중 연장자로서 재산과 신망이 있는 자가 선출되었고, 임기나 보수가 따로 정해지지는 않았다. 유사는 실제로 계의 업무를 수행하였으며, 약간의 수당을 받고 1∼2년의 임기가 정해져 있는 경우가 보통이다. 도가는 계의 사무소를 지칭하기도 했으며, 유사를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 장재는 재산의 보관과 현금의 출납에 종사하였으며, 서기는 장부, 문서 및 기타 잡무에 종사하였다. 이들은 계원이 선출하기도 하고 계장이나 유사가 촉탁하기도 하였으며, 대개 유급(有給)이었다.

참고문헌 : 한국사 34 -조선후기의 사회 (국사편찬위원회, 1995), 조선시기 촌락사회사 (이해준, 민족문화사, 1996)

친족체계의 변화

조선시대의 친족체계는 당초 내외친을 망라하는 양계친족체계였다. 그런데 17세기 중엽을 전후로 하여 그 체계가 적장자 중심의 부계친족체계로 변하는 모습을 드러냈다. 남귀여가혼 관습의 소멸, 족보에서 친족 수록범위의 축소, 입양제도의 일반화와 입양에 있어서의 처, 모변의 제외, 제사 및 재산상속에서의 장자우대 등의 현상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17세기에 전개된 이같은 친족체계의 변화는 18세기에 이르러 재향사족들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노력과 결부되어 향촌사회의 구조와 운영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18세기 중엽을 전후로 하여 향촌사회에서 종전의 지위와 세력을 상실하기 시작한 재향사족들이 그 지위와 세력을 유지 또는 만회하려고 부계친족체계를 바탕으로 하는 족적 결속을 꾀하여 갔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향, 향리와 결부된 수령체제하에서는 과거 군현단위의 향약이나 향규의 운영보다도 촌락단위의 결속과 농민지배가 자신들의 지위 세력을 유지 신장하는데 더욱 효과적이라고 판단하고 이러한 결속을 부계친족체계의 친족구조에서 구한 것이다.

참고문헌 : 한국사 34 -조선후기의 사회 (국사편찬위원회, 1995), 조선시기 촌락사회사 (이해준, 민족문화사, 1996)

동족마을의 형성과 확산

동족마을이 형성 발달하기까지 조선시대의 촌락은 대체로 소수의 성이 다른 친족 사족들이 동족적 유대를 지니고 다수의 평민, 천인호를 지배하는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것은 성이 다른 사족들이, 내외친족이 동일시되는 친족관념과 자녀균분상속제 하에서 동족적 유대를 지니고 농지개발을 통한 촌락발전의 주역을 담당했던 데서 이루어진 구조였다.
그런데 동족마을의 발달은 촌락의 주도권을 장악한 특정 성씨 이외의 다른 성의 친족들의 지위를 날로 약화시켜 이들을 점차 이탈시켜 갔다. 완전한 동서동족의 촌락을 성립시켜 간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양반사족의 촌락과 평민, 천민의 촌락으로 분화되는 변화도 보였다. 주민의 증가와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농지의 확대로 촌락의 분화가 불가피하기도 했지만 이를 계기로 족적 결집을 과시하고 신향과의 차별화를 보이려는 조치이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사 34 -조선후기의 사회 (국사편찬위원회, 1995), 조선시기 촌락사회사 (이해준, 민족문화사,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