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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궤의 재현상품의 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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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의 유통

경강지역의 상업발달
경강포구의 상업발달-경강주변의 인구변화

경강의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인구의 증가와 그 구성의 변화였다. 17세기 중반 이후 경강 주변의 인구는 대폭 늘어났고 서울의 지역공간의 확대도 대부분 경강변이었다. 17세기 이후 경강에는 지방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거주하였다. 지방에서 상경하여 경강에 정착한 주민들은 주로 상업활동에 종사하거나, 각종 화물의 하역이나 운반노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였다. 또 산릉역(山陵役 )등 각종 토목공사에 노동자로 고용되었다. 그 밖에도 경강주민들은 고용대가를 받고 모집에 응하여 군병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주로 호위군관, 훈련도감 군병, 금군, 마병 등이었다. 한편 외부에서 이주하지 않고 원래 경강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주로 선업(船業)에 종사하였다. 이들은 어부이거나 또는 경강선으로 세곡임운에 참여하는 경강선인들이었다. 이들은 강변에 누대에 걸쳐 생활한 까닭에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선상들을 접대하여 살아가는 여객주인업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18세기 중엽 이후 권세가와 결탁하여 경강부민, 경강부상, 경강무뢰배 등으로 불리면서 시전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성장하기도 한다. 18세기 경강지역은 이러한 빈민과 부상들을 포함하여 4만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상업중심지로 번성하였다.



참고문헌 : 朝鮮後期 서울 商業史硏究 (고동환,1998) , 서울상업사 (이태진 외,태학사,2000)

경강포구의 상업발달-상업중심지의 확대

경강도 17세기 중엽 이전에는 상품유통보다 세곡운송. 어물채취와 집하기능이 중시되었으나 포구상업이 발달하면서 경강은 상업중심지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경강이 상업중심지로 발전하게 되면서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상업중심지의 확대였다. 18세기 전반까지 한강. 용산강. 서강을 중심으로 상업중심지가 형성되었다. 한강지역은 현재의 한남대교 부근에서 노량진까지로 여기에는 두모포가 있어 한강 상류의 각종 물자들이 집하되어 서울에 반입되던 곳이었고 서울의 물화가 삼남지역으로 나가는 중요 통로였다. 용산강 지역은 경상. 강원. 충청.경기도 등지의 세곡을 한강 상류로부터 실어오는 참운선(站運船)의 종착점이었다. 특히 용산강 하류의 마포는 어물과 상품유통의 중심지였다. 서강지역은 바다를 통해 경강에 반입되는 황해. 전라. 충청. 경기 등지의 세곡이 집하되는 곳이었다. 18세기 후반에는 5강(한강. 서강. 마포. 망원. 용산), 다시 8강(한강. 서강. 용산. 마포 .망원정. 두모포 .서빙고. 뚝섬)으로 확대되고 19세기 전반에는 연서, 왕십리. 안암. 전농을 더하여 12강까지 확대되었다. 한편 경강은 조류의 도달지점을 기준으로 조선 초는 한강진, 조선 후기는 용산을 수상지역과 수하지역으로 구분되었는다. 수상. 수하지역은 물의 흐름이 달랐으므로 선박의 종류와 성격도 달랐다. 그리고 이는 상권과도 관련되어 경강의 객주나 여각들도 서빙고. 두모포. 뚝섬의 윗강여각과 서강. 마포. 용산. 망원. 합정의 아랫강여각으로 구분되었다.

참고문헌 : 朝鮮後期 서울 商業史硏究 (고동환,1998) , 서울상업사 (이태진 외,태학사,2000)

경강포구의 상업발달-경강의 시장

경강 주변의 상업중심지가 확대됨에 따라 각종 시전이 생겼다 마포에는 염전(鹽廛). 미전(米廛). 칠목전(漆木廛). 잡물전(雜物廛). 간수전(艮水廛)과 토정고초전(土亭藁草廛). 토정시목전(土亭柴木廛) 등이, 용산에는 염전. 시목전. 옹리합회전(瓮里蛤灰廛)이, 서강에는 미전. 시목전 외에도 흑석리 시목전이 설치되었고, 뚝섬의 시목전, 두모포의 시목전 등이 개설되었다. 마포에는 한강 상류의 목재와 서해의 어물을 주로 취급하였다. 따라서 여객주인업도 발달하였다. 18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보잘 것 없는 가난한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나, 18세기 중엽 이후 이들은 부상대고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경강포구 가운데 가장 시전이 많았다. 서강에는 마포와 함께 소금에 절인 생선을 취급하는 포구였으며, 염어선으로 고기잡는 어민들이 활동하였다. 망원. 합정 지역에서는 얼음을 채취, 저장하여 빙어선에 대한 영업을 독점하였다. 노량진은 주교가 설치되었던 곳으로 시흥. 수원으로 가는 나루였으나 물이 얕아 큰 선박이 들어올 수는 없었다. 조선소가 있어 한강진선이나 각종 선박을 제작하였다. 한강진은 삼남지역으로 내려오는 나루로서 중요했다. 이 곳에는 한강 상류에서 내려오는 고추, 마늘, 감자, 고구마 등의 농산물과 목재장작 등이 유통되었다. 두모포 근처에는 서빙고. 동빙고가 있어 얼음을 채취 정장하였다. 뚝섬은 한강 상류의 목재의 집산이다.
경강은 서울 도성에 대해서는 미곡, 목재, 어물, 소금과 같은 상품의 도매시장역할을 하였다. 소매상이나 행상들은 경강에 와서 어염이나 젓갈, 목재, 주류 등을 구입해 도성안에 들어가서 일반소비자에게 판매하였다. 또 경강은 전국시장에 대해서는 전국의 상품가격을 조절하는 중심시장의 기능을 하였다. 미곡의 경우 정조9년(1785) 서울 인구20만명의 1년 소비량이 100만석으로 추정되었다. 이 중 공가에서 20여만 석, 사대부들의 지방 추수곡에서 20여만 석을 충당하고, 나머지 60여만 석은 미곡상인에 의해 모두 경강을 통해 반입, 유통되었다. 당시 경강에 집하되는 미곡을 '강미(江米)' 또는 '강상미(江上米)' 라고 했는데, 이 강상미는 전국 미곡가격의 동향에 민감하였다. 다른 지역에 큰 흉년이 들어 미가가 높으면 경강의 무곡상들은 경강의 미곡을 다시 지방으로 내려보내 많은 이익을 남겼다. 그 양이 심할 경우 강상미의 1/3에 달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朝鮮後期 서울 商業史硏究 (고동환,1998) , 서울상업사 (이태진 외,태학사,2000)

경강포구의 상업발달-경강선박

경강의 선박은 현종 원년(1660)에 용산 이남의 강촌에 정박한 선박은 총 191척이었다. 숙종 28년(1702)에는 200석에서 1천석까지 실을 수 있는 경강선은 300여 척으로 늘어났다. 18세기 전반 경강에는 미곡 운송선을 포함하여, 어선 등 소소한 선박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2000여 석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18세기 후반 작대법이 도입되어 경강선에 의해 세곡 운송이 독점될 때, 1천석을 실을 수 있는 경강대선만도 120여 척에 달했다. 선박의 규모도 커져 경강선의 법정적재한도는 17세기 후반 500석에서 18세기 후반에는 1000석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보통 법정한도를 넘어 1500석을 실었으며, 2000석을 싣는 선박을 건조하기도 했다.

참고문헌 : 朝鮮後期 서울 商業史硏究 (고동환,1998)

하역운수업과 장빙업

경강은 전국 해운과 수운의 중심지였으므로 세곡을 비롯한 각종 화물의 하역운수업이 발달하였고, 서울에서 소비되는 모든 얼음을 이 곳에서 채취하여 판매하는 장빙업도 경강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도성 내부에서 정부의 화물을 수레를 이용하여 운송하는 것은 거계(車契)가 담당하였으며, 도성 내부에서 말을 이용한 화물의 운송은 세마계(貰馬契)가, 조세곡 운송은 마부계가 각각 담당하였다. 경강에서는 세곡의 하역과 각 창고까지의 운반역은 모민계와 운부계. 마계가 각각 담당하였는데, 모민계와 운부계는 사람의 등이나 지게를 이용하여 운반하였으며, 마계는 말을 이용하여 태운하였다. 이처럼 조선시대 각종 운수역은 운반 화물에 따라 운송을 맡은 담당자가 달랐고, 운송 수단에 따라서도 담당자가 달랐다.
18세기 이후 얼음의 수요처는 정부나 국가, 사대부만이 아니었다. 주된 수요처는 18세기에 출현한 냉장선의 일종인 빙어선(氷魚船)과 생선전. 현방(懸房).저육전(猪肉廛) 등이었다. 때문에 민수용 얼음을 저장 판매하는 창고인 사빙고도 성종대에 창설된 이후 18세기 후반에는 크게 늘었다. 빙계가 창설되기 전 사빙고는 수상과 수하지역에 30여 곳이 있었지만 수요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번성하였다. 민간 장빙업은 1년에 10만 냥에 달할 정도로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었으므로 민간장빙업자들은 대부분 유력한 양반이 아니면 불가능했고, 따라서 얼음판매를 둘러싸고 빙계와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결국 정조11년(1787)빙계의 얼음판매독점권인 장빙도고가 혁파되었다.

참고문헌 : 朝鮮後期 서울 商業史硏究 (고동환,1998)

경강상인

포구에서의 상업세력은 다양하였다. 경강지역에는 선상을 접대하고, 상품의 매매를 주선한 대가로 구문을 받았던 경강여객주인층, 세곡운송을 전담하였던 경강선인층, 우월란 수송능력을 토대로 지역적 가격차를 이용하여 상품유통을 전개했던 경강선상층, 그 외에도 목재상인,염상 등 다양한 상인층이 있었다.

참고문헌 : 朝鮮後期 서울 商業史硏究 (고동환,1998), 서울상업사 (이태진 외,태학사,2000)

포구상업
해상교통의 발달

일반적으로 17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전국적 해상교통에는 장애가 많았다. 뱃길 중 가장 어려운 곳이 황해도의 장산곶과 충청도의 안흥량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중엽이후 이런 장애는 대부분 극복되었으며, 연해지역과 도서지역의 개발로 전국의 연해지역을 연결하는 해로유통권이 성립할 수 있었다. 전국 연해지역을 육상으로 연결하는 총 10,526리의 연로(沿路)와 더불어 경강에서 함경도 경흥과 두만강에 이르는 뱃길, 경강에서 의주까지의 뱃길, 해남에서 제주에 이르는 뱃길 등으로 크게 구분된다. 해상교통의 발전을 반영하여 선박의 규모도 점차 커졌다. 17세기 후반까지는 조운선 한 척의 법정 적재량이 500석이었으나 18세기 후반에는 1000석이었다. 경강선의 적재량은 이보다 규모가 커서 규정을 무시하고 1500석을 적재하여 운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2000석을 실을 수 있는 선박을 건조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朝鮮後期 서울 商業史硏究 (고동환,1998)

포구시장권의 형성

18세기 이후 해상교통은 주로 남해안과 서해안 그리고 경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대동강 등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해상교통의 발전에 따라 17세기까지 어물채취, 세곡운송, 군사적 방어기능을 주로 담당했던 외방포구도 점차 상업중심지로 변모하였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걸쳐 해상이나 강상요지에 포구를 신설하거나 폐기되었던 포구를 다시 설치하고, 선박의 접안시설을 증설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이 사업은 축항사업, 주선, 암초제거사업 등이 병행되어 막대한 자본과 인력이 동원되었으므로 대부분 재력가가 정부나 지방권력의 용인 하에 이루어졌다. 관청에서는 이들에게 포구에서의 독점적인 상품유통을 담당할 수 있는 포구주인권을 인정하였다.
조선 후기의 포구상업의 발전으로 대포구와 그 주변의 소포구, 그리고 장시를 연결하는 유기적 유통권이 형성되었다. 대포구 주변의 소포구들은 대포구의 시장권 안에 포섭되면서 발전하였다.

참고문헌 : 朝鮮後期 서울 商業史硏究 (고동환,1998)

포구상업세력

포구에서의 상업세력 중 대표적인 세력은 주인층(主人層)이었다. 이들은 포구주인. 선주인(船主人). 강주인(江主人). 강주인(舡主人). 여주인(旅主人). 저점(邸店). 객주(客主). 여각(旅閣) 등으로 다양게 불렸지만, 기능은 여객주인과 마찬가지로 포구에서의 상품유통을 매개하는 것이었다.
포구에서는 포구 주위의 유력자가 포구신설 등 포구조성에 투자하거나 지방사회의 권력을 배경으로 주인권을 갖고서 포구에 드나드는 선상들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주인권은 매매. 상속. 양도 등이 자유로운 재산권으로서 법적이 보호를 받을 수 있었고, 궁방이나 중앙의 아문에 투탁하여 지방권력기관의 침탈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주인층은 선상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배경으로 상품 구매시 선상에게서 시세보다 싼 값에 구매하거나, 가격지불을 고의로 늦춰 막대한 이익을 남겼다. 또 주인층은 이렇게 매집한 상품으로 포구에서의 출하시기와 출하량을 조절하여 최대한의 독점이윤을 획득하였다.

참고문헌 : 朝鮮後期 서울 商業史硏究 (고동환,1998)

상업도시의 형성
상업도시의 성장

17세기 후반 이후 상품화페경제의 급속한 발전에 따라 서울은 물론 지방에서도 상업도시가 성장하였다. 지방에서 상업도시로 성장하는 곳은 대체로 서울의 배후도시로서 성장한 개성과 수원, 상품유통의 거점이 된 송파장과 누원점, 평양. 대구. 전주 등 각 도 감영소재지로서 전통적 행정 중심지, 대포구로서 전국적 시장권의 주요 거점이던 덕원 원산포, 창원 마산포, 은진 강경포, 국제무역의 중심지였던 동래와 의주 등지였다.

참고문헌 : 朝鮮後期 商業資本의 發達 (강만길, 고려대학교출판부,1973), 朝鮮前期 商業史硏究 (박평식,지식산업사,1999)

장시의 발달
상업적 농업과 농촌수공업의 발달

농업과 수공업에서의 상품생산의 발전은 상품유통시장의 확대를 동반하는 것이었다. 즉, 각 지방의 장시나 포구시장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농업과 수공업에서의 상품생산이 성장하였다.
도시 근교의 상업적 농업으로는 왕십리와 청파의 미나리, 살곶이다리의 순무, 연희궁의 고추와 부추, 이태원의 토란 등이 유명하였다. 농촌의 상업적 농업작물로는 진안의 연초, 전주의 생강, 임천. 한산의 모시, 강진의 고구마, 개성. 강계의 인삼, 경상. 전라도 지방과 공주. 황간. 회덕. 황주 등의 면화가 널리 알려졌다. 전주. 김제. 만경의 완미(完米), 황해도 연백평야의 메쌀, 봉산의 장요미(長腰米), 여주. 이천의 세도(細稻) 등이 상품화된 미곡으로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농촌지역에서의 수공업도 부업적이고 자급적인 형태에서 발전하여 전업화.상품생산화되었다. 모시는 한산. 임천. 서천. 홍주, 명주는 평안도의 안주. 개천. 성천, 삼베는 함경도 길주. 명천. 안변, 왕골돗자리는 경상도의 안동, 면포는 경상도. 전라도 일대, 담배는 평안도 성천 삼등. 양덕, 전라도의 전주. 진안 등이 유명하였다. 인삼은 개성을 중심으로 재배되어, 홍삼으로 가공되어 청나라에 수출되었다. 이른바 특산지라는 명칭이 생기기 시작한 것도 18세기 이후에 진전된 사회적 분업의 결과이다.
한편 관영수공업체제가 붕괴되고 민영화되면서 민간수공업도 발전하였다. 민간수공업자들은 도시만의 수요에 맞춰 상품을 생산, 공급하여 생산자와 상인의 역할을 동시에 하였다. 유기. 칠기. 자기와 같은 수공업품은 생산도 지역적으로 특화되어, 특히 경기도 안성과 평안도 정주의 유기산업은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사 33 조선후기의 경제 (국사편찬위원회,1998), 朝鮮後期 商業資本의 發達 (강만길, 고려대학교출판부,1973)

육상교통의 발달

18세기 이후 상품유통의 발전에 따라 육상교통도 발달하였다. 영조46년(1770) 신경준의 '도로고(道路攷)'에 전국을 연결하는 대로(大路:간선도로)는 서울-의주로, 서울-경흥 서수라로(慶興西水羅路), 서울-동래로, 서울-제주로, 서울-평해로(平海路), 서울-강화로의 6대로였다. 그러나 19세기 전반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는 서울에서 태백산(봉화)에 이르는 길이 간선도로로 승격되어 7대로가 되었고, 19세기 중엽에는 9대로, 그 이후에는 10대로가 되었다. 이는 별로(別路)나 지로(支路)들이 이용율의 증가에 따라 간선도로로 승격했기 때문이다.
간선도로망의 확대와 더불어 숙종30년(1704)에는 서울-강화로가 정비되고, 정조연간에는 수원성의 축성으로 수원과 서울을 연결하는 도로가 새로 개설되었다.
서울과 지방을 연결하는 도로도 새로 생겼다. 18세기 중엽에는 서울에서 함경도로 가는 길은 기존의 철령을 지나는 길 외에 평강을 지나는 삼방간로(三防間路)와 평강의 설운령을 통과하는 새 길이 뚫렸다. 서울에서 영남지역으로 가는 길은 17세기 후반 이후에는 조령과 죽령 외에도 상주와 서원(청주) 지방으로 통하는 고갯길과 문경과 괴산 사이의 고갯길 등이 개척되었다. 이 외에 국방문제로 통행이 엄격히 제한되던 함경도와 평안도에도 길주-갑산을 잇는 설령(雪嶺)의 길이나 함경도 내의 육진(六鎭)지역의 교통로 및 무산령로. 갈파령로 등의 길이 확대되었다.

참고문헌 : 朝鮮後期 서울 商業史硏究 (고동환,1998)

장시(場市)

15세기 말 전라도에서 비롯된 장시는 삼남지역을 거쳐 정부의 금압정책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이후 경기지역에까지 보편화되었다. 나아가 17세기 이후에는 중부 이북의 황해도. 평안도 지역까지 확대 발전하였고, 숙종26년(1700)에는 곡산과 같은 산간고을까지 장시가 열렸다. 18세기 중엽에는 조선 전역에 약 1000개 이상의 장시가 존재하였다.
17세기 후반 이후에는 열흘장이었던 장시가 대부분 5일장으로 바뀌면서 군현단위의 시장권이 형성되었고 18세기 후반부터 1830년대에는 지역적 상품유통의 거점인 대장(大場)이 성립하였다. 대표적인 대장이 경기 광주의 사평장. 송파장, 안성의 읍내장, 교하의 공릉장, 은진의 강경장, 익산의 덕평장, 잔주 읍내장, 남원 읍내장, 창원 마산포장, 평창의 대화장, 토산 비산장, 황주 읍내장, 봉산 은파장, 박천 진두장, 덕원 원산장 등이었다.
한편 도시시장의 발달에 따라 도시시장을 연결하는 중간지점에 장시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단순한 숙박시설이던 점막(店幕)이 18세기 후반 상인들이 주로 이용하게 되면서 상품교환이 행해지는 시장의 기능을 갖게 되었다. 대표적인 곳이 서울-원산을 잇는 대로변인 포천의 송우점(松隅店)과 양주의 누원점(樓院店)이었다. 또 해상교통의 발달로 한강연안에 물자의 유통이 활발해지자, 한강 상류의 부정기적인 갯벌장이나 하류의 포구들도 점차 정기적인 장시로 발전하였다. 남한강 연안의 백애촌(白崖村), 북한강 연안의 홍천장. 인제장과 한강하류의 덕은장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참고문헌 : 16세기 장시의 성립과 그 기반 (이경식, 한국사연구 57,1987), 18세기말 19세기초 장시발달에 관한 기초연구 (한상권, 한국사론 7, 서울대,1981)

보부상

부보상이라고도 하며 보상(褓商:봇짐장사)과 부상(負商:등짐장사)을 함께 일컫는다. 보상은 우사(右社), 부상은 좌사(左社)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좌우사 곧 부보상이 적절한 명칭일 것이다.
우리 고유의 상인은 크게 좌상(坐商)과 행상(行商)으로 나뉘고, 행상은 다시 육상(陸商)과 수상(水商)으로 구분하는데 육상이 보부상이다. 조선시대 근대 이행기까지 상거래의 주역은 보부상이었다. 보부상은 전통사회의 시장을 중심으로 행상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경제적 교환을 이어주던 전문상인이다. 송상, 만상, 유상, 내상, 북상 등도 각 지역의 보부상을 의미한다. 지금은 보부상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원래 보상과 부상은 운반수단과 판매장소와 취급물품에 따라 엄격하게 구분되어 부상이 보상의 상품을 가지고 행상한다든지, 그와 반대되는 경우에도 허용되지 않았다. 대부상과 대보상들은 배나 우마차를 이용하여 다량의 상품을 운반하여 판매하기도 하였다. 보상과 부상은 각각 별개의 행상조합조직으로 발전해 각자무뢰배나 하급 관리의 침탈을 금지하여 상권 확립을 꾀하고, 신분을 보장하였으며 조직원 간의 신의와 상호부조를 중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의 보부상 (이창식,밀알,2001) , 시장으로 보는 우리문화 이야기 (정승모, 웅진닷컴,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