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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궤의 재현조선의 상업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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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상업정책

조선은 건국 이후 조선 정부의 경제 정책은 '무본억말(務本抑末)'의 경제정책과 이념이 상업정책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농업은 그것이 의식의 근원으로서 백성의 생명에 관계된 산업이므로 본업이고 공, 상업은 말업이라는 인식에 기초한 정책이었다 국가가 인정하고 파악하는 전업상인 이외의 일반 민인, 특히 농민의 상업 종사는 금지 억제되었다.
도성에서는 시전상인에게 일정한 상세(商稅)를 부담시키는 대신 이들의 도성 내 상업독점을 허용하고, 지방에서는 노인제도(路引制度)등으로 행상과 장시에 대한 통제를 하였다.
국가의 재정운영과도 관련하여 도성에 시전을 조성하고 시전상인을 보호, 육성함으로써 정부와 도성민의 상품수요에 부응하게 하였다. 소농민, 빈농이 자급할 수 없는 물품의 수요를 위해서도 소규모 행상으로서 육상의 교역활동을 허락하였다. 다만 이들 상인의 상업활동을 국가적 차원에서 철저하게 관리 통제하는데 주력하였다.

참고문헌 : 조선전기상업사연구 (박평식, 지식사업사,1999.)

시전(市廛)

조선시대 시전은 도성민의 생활용품을 판매하고 봉건정부가 필요로 하는 물품을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상업조직이었다. 대체로 조선 전기에는 정부가 시전상가를 배치하고 판매상품에 따라 업종별로 구획을 설정하여 영업을 허가해 주고, 그 대가로 시전상인들에게 상업세로서 시역(市役)을 부과하면서 시전체계를 유지하였다. 당시에는 아직 시전의 종류도 많지 않고 난전의 활동도 그렇게 활발하지 않았으므로, 시전 구성에 대한 재정비나 정부와 시전 사이에서의 마찰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내려와 생산력이 증대되고 유통경제가 발전하면서 시전의 종류도 증가하고 시전 상업이 더욱 발달하게 되었다. 동시에 종래 시전 중심의 유통체계에 난전세력이 새로이 성장하게 되자, 정부는 시전의 상권을 보호하고 또 상업에서의 이윤을 흡수하기 위해 시전체계의 정비에 주력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시전의 구성을 재정비하여 모든 시전을 유분전(有分廛)과 무분전(無分廛)으로 구별하고 시전상인들에 대하여 시역을 철저하게 분정하여 관리하게 되었다. 또한 시전 중에서도 특정 시전을 육의전(六矣廛)으로 편성하여 국가의 중요한 재정수요를 해결하였다. 나아가 비시전 상인의 활동이 두드러지자 이들 난전으로부터 시전 상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시역 부담을 매개로 법적인 금난전권(禁亂廛權)을 부여하였다.

참고문헌 : 朝鮮後期 市廛商人 硏究 (변광석, 도서출판 혜안, 2001), 朝鮮後期 商業資本의 發達 (강만길, 고려대학교출판부,1973)

시전(市廛)의 활동

조선시대 시전은 태종 때 고려 개경에 있던 시전을 그대로 본떠, 한성 종로를 중심으로 중앙 간선도로 좌. 우에 공랑점포(公廊店鋪)를 지어 관설상점가(官設商店街)를 만들어 상인들에게 점포를 대여, 상업에 종사하게 하고 그들로부터 점포세 · 상세(商稅)를 받은 데서 비롯하였다. 시전의 감독기관으로는 경시서(뒤에 平市署)에서 시내 상업교역에 관한 물가조절, 상세(稅商) 징수 도량형기의 단속 등을 주관하고 청제감(淸齊監)은 시가의 청결을 감독하였다. 공랑세는 시전 건물 한 칸마다 봄과 가을 각각 저화 1장 씩을 받았으나, '경국대전'에는 봄.가을 저화20장씩을 납부하도록 규정하였다. 다만 도성민의 생계를 위해 성내 각처의 영세 소점포에서 활동한 상인들은 과세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같은 상품을 매매하는 시전 상인들이 모여서 일정한 동업자 조합을 만들고, 이 조합을 통하여 정부와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였다. 각 조합의 임원진에는 대행수(大行首)가 조합의 대표자로서 사무를 총괄하고, 각 전들은 저마다 도가(都家)라는 사무실과 도중(都中)이라는 일종의 동업조합을 조직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서울 외에 개성, 평양, 수원 등 지방의 주요도시에서도 일반 시전이 개설되어 영업하고 있었다.

시전(市廛)의 종류

구체적인 시전으로는 입전(立廛:수입품 비단), 백목전(白木廛:각종 면포), 지전(紙廛:종이), 철물전(鐵物廛:철물), 면주전(?紬廛:비단), 어물전(魚物廛:생선), 염전(鹽廛:소금), 우마전(牛馬廛:말과 소), 목화전(木花廛:목화), 면자전(綿子廛:견사), 모전(毛廛:과일), 화피전(樺皮廛:채색 물감) 등이 있었다. 도성 밖 주민에게 쌀을 파는 문외미전, 대시목전(대시목전:목재와 땔감) 등은 도성 밖에 있었다. 비시전계 상인들은 특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소소한 물종에도 대부분 시전을 창설하였다. 그 결과 시전의 수도 크게 늘어 ,17세기 전반 30여개 였던 시전이 18세기 말에 이르면 120여개로 증가하였다. 이 때 창설된 시전의 판매물종은 수공업자들이 종전부터 제조와 동시에 판매하던 물종이거나 또는 영세소시민들이 노점을 벌여 판매하는 미나리나 채소류 등이 대부분이었다.

참고문헌 : 朝鮮後期 市廛商人 硏究 (변광석, 도서츨판 혜안, 2001), 朝鮮後期 商業資本의 發達 (강만길, 고려대학교출판부,1973)

육의전

종로의 시전 중 대표적인 것으로 육주비전(六注比廛) · 육부전(六部廛) · 육분전(六分廛) · 육장전(六長廛) · 육주비전(六調備廛) · 육주부전(六主夫廛) 등이라고 한다. 선전(線廛 또는 立廛:수입 비단과 백사), 면포전(綿布廛:무명과 은),면주전(綿紬廛:국산 비단), 지전(紙廛:종이), 저포전(苧布廛:모시,베), 어물전(魚物廛:생선) 등이다.
시전을 통한 세원을 확대, 확보하기 위해 국역이란 형식으로 종래보다 높은 상업세를 거두게 된 것이 육의전이다. 그러나 국역부담의 고액전이 6종류의 시전에 한정된 것이 아니고, 때로는 칠의전(七矣廛) · 팔의전(八矣廛)이 되기도 하고, 구성도 국역의 부담능력 · 조달능력에 따라 변하였다. 입전이나 면주전의 경우 수입과 국산의 고급 비단을 취급하므로 유통이익이 매우 크고, 기타 직물 시전의 경우에도, 면포, 저포, 마포, 청포 등의 상품거래량이 광범하고 유통이익도 컸다. 따라서 이처럼 수익성이 큰 시전에게 국역부담율을 높이 책정하고 이들을 육의전으로 편성해 간 것이다.

참고문헌 : 朝鮮後期 市廛商人 硏究 (변광석, 도서출판 혜안, 2001) , 서울상업사 (이태진 외, 태학사,2000)

유분전과 무분전

국가에서 육의전에 국역을 부담시킬 때는 경시서(京市署)를 통하여 상납시킬 품목·수량을 각 전(廛)의 도가(都家)에 내려 보내면, 도가는 소속된 여러 전의 부담능력에 따라 비율을 정하여 총괄, 미리 각 전에서 물품을 징수 보관하였다가 명령이 있는 즉시 납품하였다. 여기에서 역(役)을 부담한 시전을 유분전(有分廛), 국역의 부담을 지지 않은 시전을 무분전(無分廛)이라 하였다. 유분전은 10분전(十分廛)에서 1분전까지 10등급으로 나뉘었다.
'만기요람'에 보이는 육의전의 역분(役分)을 보면 ① 육의전 중 수전(首廛)인 선전(또는 입전)은 10분역(十分役), ② 면포전은 9분역, ③ 면주전은 8분역, ④ 지전은 7분역, ⑤ 저포전은 모두 합하여 11분역, ⑥ 내외어물전은 모두 합하여 9분역으로 구분되었다. 부담한 국역의 내용은, 관부(官府)의 수요에 따라 부과된 임시부담금, 궁중의 수리도배(修理塗褙)를 위한 물품 및 경비부담, 왕실의 관혼상제의 수요품 조달, 해마다 몇 차례 청나라에 보내는 원공(元貢:歲幣와 方物) 및 원공의 부족량을 관부에서 구입하는 별공(別貢), 육의전에 없는 상품을 육의전에 위임하여 광구무납(廣求貿納)하는 공무(公貿)가 있다. 정부에서는 별무와 공무의 대금만 일부 절전(折錢)이라는 형식으로 보상할 뿐이어서, 육의전의 부담이 과중함에 따라 육의전은 그 대가로 강력한 특권을 부여받아, ① 정부로부터의 자금대여, ② 외부압력으로부터의 보호, ③ 금난전권에 의한 도고상업(都賈商業:독점상업)의 권리 등을 부여받았다.

참고문헌 : 朝鮮後期 市廛商人 硏究 (변광석, 도서츨판 혜안, 2001)

난전

17세기 이후 도시의 인구가 늘어나고 상업이 발전하면서, 서울의 경우 시전상가 외에 남대문 밖의 칠패(七牌)와 동대문 근처의 이현(梨峴)등에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고 거리마다 난전이 생겨 시전의 전매품을 매매하게 되었다. 또한 비교적 큰 자본을 가진 사상도고(私商都賈)가 서울 외곽의 송파 · 동작진 · 누원점 · 송우점 등에서, 삼남 · 동북지방에서 올라온 상품을 매점하여 서울 성안의 난전상인에게 넘김으로써 난전활동을 활발하게 하였다.
이들은 대개 봉건 특권층과 결탁하여 관부에 일정한 사업세를 내고 자신의 상권을 확보함으로써 육의전과 같은 특권적 시전상인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에 육의전을 비롯한 시전상인은 한때 정부로부터 난전을 금지하는 금난전권을 얻어 난전에 압박을 가하였다.

참고문헌 : 朝鮮前期 商業史硏究 (박평식,지식산업사,1999)

난전(亂廛)의 등장

난전은 17세기 후반까지는 전안(廛案)에 등록되지 않은 상인들의 자유상행위만을 지칭하는 것이었지만, 1706년 시안에 시전에서 취급한 물건의 종류와 상인의 주소, 성명이 등록되지 않은 자나 판매를 허가받지 않은 상품을 성안에서 판매하는 행위를 뜻하였다.
18세기 중엽이후 나타난 난전 유형을 살펴보면, 첫째 수지물(手持物) 판매가 합법적으로 허용된 군병들의 난전, 둘째 외방 향상(鄕商)과 선상(船商)에 의해 전개된 난전, 셋째 수공업자들이 직접 제조판매하는 난전, 넷째 부상대고와 세력가의 하인들이 생산지나 서울로 반입되는 중간에서 물건을 매집하여 전개하는 난전, 다섯째 시전체제 하부에 종속되어 있던 여객주인 중도아층에 의해 시전상인을 배제하고 상품을 유통시키는 난전, 여섯째 시안에 등록되지 않은 물종을 판매하면서 나타난 시전 상호간의 난전 등으로 구분될 수 있다.
조선은 초기부터 국역(國役)을 부담하는 육의전(六矣廛)과 시전상인에게 그 보상으로 상품을 독점 판매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고, 이 규정을 어기고 마음대로 상행위를 하면 난전이라 하여 금지시켰다. 18세기 전반까지 서울에 나타난 난전은 수공업자나 영세소상인에 의한 난전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사상도고에 의한 난전이 가장 두드러져 기존의 시전체제를 위협하는 형태로 되었다. 난전의 주체는 주로 서울의 권세가와 그들의 가복(家僕), 각 관아의 저리(邸吏), 호위청(扈衛廳) 산하의 군병(軍兵)과 각 영문의 수공업자, 서울과 개성의 부상(富商) ·도고(都賈)나 중도아(中都兒) 등이었다.

참고문헌 : 朝鮮後期 市廛商人 硏究 (변광석, 도서츨판 혜안, 2001), 한국사 33 조선 후기의 경제 (국사편찬위원회,1997)

금난전권 (禁亂廛權)

금난전권은 일종의 도고권(都賈權)으로서 국역을 부담하는 육의전을 비롯한 시전이 서울 도성안과 성저십리(城底十里 : 도성 아래 10리까지) 이내의 지역에서 난전의 활동을 규제하고 특정 상품에 대한 전매특권을 지킬 수 있도록 조정으로부터 부여받았던 상업상의 특권을 말한다. 이것은 난전상인을 고발하고(난전인 속공권), 그 상품을 압수할 수 있는(난전인 착납권) 권리이다.
조선 후기 난전은 어용상인인 시전상인의 상권을 침해하였고, 이에 시전상인은 자신의 상업적 특권을 유지·보호하려고 난전 금지를 정부에 요청하였다. 정부는 재정수입을 늘릴 목적에서 국역을 부담하는 육의전을 비롯한 시전상인에게 서울 도성 안과 도성 아래 십리 이내의 지역에서 난전의 활동을 규제하고, 특정 상품에 대한 전매권을 지킬 수 있도록 하는 금난전권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이 정책으로 인해 신흥상공업자들의 시장진출이 억제되어 건전한 상공업의 발전이 저해되었고, 도시 소비자나 영세상인 및 소규모 생산자층의 피해가 증가되었다. 이에 당시 성장하고 있던 권세가의 호노(豪奴), 일부 수공업자 및 사상도고(私商都賈) 등의 세력은 금난전권의 혁파를 주장하게 되었고, 드디어 정조 15년(1791) 신해통공(辛亥通共)으로 육의전을 제외한 일반 시전상인이 지녔던 금난전권이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朝鮮前期 商業史硏究 (박평식,지식산업사,1999)

신해통공(辛亥通共)

정조 15년(1791)에 육의전(六矣廛)을 제외한 모든 시전(市廛)의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혁파하고 개인 상인의 자유로운 상행위를 보장한 상업정책이다. 이 해가 신해년이었으므로 신해통공이라 한다.
조선 중기 이후 농촌 인구의 도시 유입으로 도시 상업의 양상이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시전이 증가하면서 금난전권은 큰 폐단으로 대두되어 도시의 경제질서를 경화시키는 한편, 물가상승을 초래하여 영세상인 및 수공업자 그리고 도시빈민층의 생계를 위협하였다.
금난전권 혁파 논의는 영조 14년(1764)에 이미 시작되어, 정조10년(1786)에 실시된 병오통공(丙午通共)은 난전인착납권을 폐지하고 소소한 난전은 금하지 말도록 하였고, 정조 11년(1787) 소위 정미통공(丁未通共)으로 일부 시행되었다. 본격적인 시행은 1791년 남인의 영수였던 채제공(蔡濟恭)에 의해서였다. 채제공은 도가상업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육의전(六矣廛) 이외의 모든 시전에게 금난전 전매권(禁亂廛專賣權), 즉 도고권(都賈權)을 허용하지 말며, 설립 30년 미만의 시전은 이를 폐지할 것을 건의하여 받아들여졌다. 신해통공은 육의전 이외의 금난전권을 폐지한 조처로서, 시전상인의 독점적 생산과 판매제도를 철폐함으로써 물가를 안정시키고 도시 소민을 보호하고자 한 것이었다.

참고문헌 : 朝鮮後期 商業資本의 發達 (강만길, 고려대학교출판부,1973), 서울상업사(이태진 외, 태학사,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