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화성의궤의 재현이읍계획

연관목차보기

이읍계획

정조13년(1789)까지 화산(花山) 아래에 244호의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던 구 수원읍 주민들은 국왕으로부터 마을을 떠나 팔달산(八達山) 동쪽으로 이전할 것을 명받는다.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가 이 마을로 이전하기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국왕의 명을 따라 관아와 향교를 비롯한 전체 주민들은 팔달산 자락으로 옮겨갔고, 그해 9월에 현륭원(顯隆園)이 구 수원읍에 들어서면서 팔달산 아래에는 신도시 화성건설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정조18년(1794)에 시작된 화성성역은 단순히 새로운 마을을 건설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당대의 지식과 기술이 총집합된 조선시대 도시계획의 총아로서 정조의 이상적인 도시로 만들어진 것이다. 화성은 조선시대 최대의 행궁(行宮)을 가진 정치적 도시이며, 정조의 친위부대인 장용외영(壯勇外營)이 주둔하는 막강한 군사도시이다. 도성에서 삼남(三南)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교통도시일 뿐만 아니라, 저수지와 농경지를 갖춘 자립적 경제도시이며 이를 토대로 농산물과 수공업품을 활발하게 교역하는 상업도시이기도 하다. 또한, 화성성역을 위한 비용과 일꾼들의 모집에도 일방적인 부역(負役)이 아닌 임금제라는 근대적 경제논리를 적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주한 백성들의 정착을 도모하고자 이례적인 혜택을 제공하여 기회의 도시로까지 성장한 것이다.
현륭원의 천장으로 시작된 효의 도시 화성은, 현대의 도시건설에 뒤떨어지지 않는 총체적인 도시건설과 운영에 대한 열정으로 만들어졌다.



참고문헌 : 실학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 수원화성(김동욱,2002,돌베개), 18세기 말 화성지방의 번영과 산업진흥책(최홍규,경기사학2,1998), 정조대의 화성경영과 장용외영 문제-특히 읍민대책과 관련하여(최홍규,경기사학 창간호,1997), 근대를 향한 꿈(경기도박물관,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