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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궤의 재현군사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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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체계

조선초기의 군사제도는 중앙의 5위(衛)와 지방의 진관(鎭管)제체로 구성된다. 5위는 고려의 2군 6위를 이어 받아 발전시킨 것으로 문종과 세조대에 개편하여 확정되었는데, 전, 후, 좌, 우, 중의 다섯 구역으로 재편성하여 하나의 훈련체제로 만든 것이다. 5위는 중앙군의 근간이 되며, 이를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가 총괄지휘하였다.
지방에서는 세조 1년(1455) 이후에 정착된 진관체제가 근간을 이루었다. 이전까지 주로 연해안 지역에만 설치되었던 영(營)과 진(鎭) 중심의 제도를 전국적으로 확대하기 위해 내륙에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이를 중심으로 일원적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이로써 국토전체를 독립된 통수권과 작전권으로 지휘할 수 있었고, 유사시에는 각 진관을 중심으로 자체방어도 가능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전국적 조직에도 불구하고 방위만이 너무 광범위하여 실제방어에는 무력하였고, 문관(文官)출신의 수령(守令)이 군사지휘권을 겸임하는 체제하에서는 효율적인 군사운영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이에 선조21년(1588)에는 제승방략(制勝方略)을 도입하여 적의 주요접근지점에 군사를 총동원하여 집중적으로 적을 방어하게 하는 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중에 불과 16일 만에 수도를 빼앗긴 조선정부는 명나라 장수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를 토대로 군사체제의 전면개혁을 단행하여, 중앙은 5군 체제로 정비하고 훈련도감(訓練都監)을 중심에 세웠으며 지방은 속오군(束伍軍)제도로 정비하였다. 훈련도감의 설치는 병농일치(兵農一致)에 입각한 5위 체제를 일종의 직업적 전문군대로 조직하고자 한 시도였다. 이는 활과 화살 중심에서 총(銃), 살(殺), 사수(射手)의 전문적인 삼수병(三手兵)이 중심이 되는 군사체제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왜란 당시 임시방편으로 시작된 속오군은 지속적으로 정비되어, 농한기에는 진법훈련과 무예훈련을 실시하고 1년에 한차례씩 전체병력을 소집하여 훈련을 시행하였다. 아울러 훈련을 전담하는 영장제(營將制)를 도입하여 전문적인 군사운영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지방 도시의 재정문제와 무신(武臣)의 부족으로 효종 이후에는 영장제가 폐지되어 수령이 군사지휘권을 다시 겸임하게 되면서 그나마 유지되어 온 속오군의 훈련도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또한 군액 징수에 각종 문제점이 발생하면서 속오군의 기강은 점차 무뎌져갔고, 결국 홍경래의 난과 같은 민란조차도 지방군이 자체적으로 진압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지속적인 군제개편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의 군사제도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군사조직 편성의 목적 자체가 외세에 대한 방위보다는 지방의 반란세력에 대비하기 위한 정치목표에 기반하고 있었으며, 군사행정과 일반행정이 분리되지 않고 문관 출신의 수령이 겸임하는 비전문적 지휘체계를 따랐으며, 농업경제를 담당하는 농민과 천민만이 평생토록 병역의무를 지는 비경제적인 운영을 지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한국의 군제사(김홍,2001,학연문화사),조선조 후기 군제에 관한 연구(차문섭,1972,단국대 동양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