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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궤의 재현읍성(邑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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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성(邑城)

조선시대의 읍성(邑城)은 일반적으로 읍성 뒤의 주산(主山)에 의지하여 축조되었다. 따라서 평탄한 지형에 성곽을 건설한 중국과는 달리 그 형상이 비정형적이었고, 읍성을 둘러싸는 성곽도 지형에 따라서 불규칙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읍성안의 도시와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축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의 읍성에는 이렇다 할 방어시설을 두지 않았다. 산성(山城)과 읍성(邑城)의 이원적 성곽제도에 따라, 유사시에는 인근의 산성에 대피하여 몸을 숨기는 것이 일반적인 방어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읍성의 내부에 대해서는 전국적으로 일정한 기준을 따라 구성되었다. 읍성의 중심부에는 객사(客舍)와 관아(官衙)를 만들고, 그 앞쪽으로는 백성들의 집이 들어섰다. 객사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나 궐패(闕牌)를 모시고 한달에 두 번씩 수령(守令)이 절을 올렸고, 수령의 집무소인 관아는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대개 객사와 관아가 있는 행정시설지역과 백성들이 사는 주거지역 사이에는 읍성을 관통하는 동서방향의 큰 길이 경계를 이루며, 이 길의 중앙에서는 남문(南門)으로 향하는 대로가 정비된다. 이렇게 T자형으로 구성된 도로의 교차로는 읍성 내에서 사람들의 왕래가 가장 빈번한 곳이어서 보통 시장이 형성되곤 하였다.
읍성의 제례시설로는 땅과 곡식에게 제사 드리는 사직단이 읍성의 서쪽에, 공자를 비롯한 유학자들을 모시는 문묘가 향교와 함께 동쪽에 만들어지고, 읍성의 수호신을 모시는 성황당은 인근의 산 속에 세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읍성의 열악한 군사적 방어성과 고립적 형상에 의한 상업경제의 미약함이 지적되면서 실학사상에 입각한 새로운 성제(城制)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난다. 이러한 결과로 만들어지는 것이 화성(華城)이며, 이후에는 기존의 읍성에서도 화성을 따라 고쳐나가는 지혜를 보여준다.



참고문헌 : 실학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 수원화성(김동욱,2002,돌베개),18세기 건축사상과 실천-수원성(김동욱,1996,발언),조선중기 읍성에 관한 연구(이상구,1983,서울대학교 석사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