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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궤의 재현불교의 사회적 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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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사회적 위상

고려시대의 불교는 국가와 개인의 신앙을 담당하며 번성하였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는 정책적으로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종단이 선종과 교종으로 통폐합되고 승려의 신분을 국가에서 관리하는 도첩제(度牒制)가 실시되었고, 16세기 이후에는 불교의 탄압이 본격화되어 승과과 폐지되고 교종과 선종이라는 최소한의 구분마저 통합되고 승려의 도성 출입도 금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을 비롯한 왕실 가족의 호불 경향은 바뀌지 않아 왕릉을 지키는 능찰은 지속적으로 건립되었다. 서울 강남 복판 선릉(宣陵)과 정릉(靖陵) 인근의 봉은사(奉恩寺)와 경기도 남양주의 세조의 능인 광릉(光陵) 주변의 봉선사(奉先寺) 등이 그 예이다.
임진왜란 동안 대부분의 사찰들이 전소되지만, 이후 17, 18세기에는 상업과 금융업의 발달로 새로운 지주세력으로 등장한 상인들에 의해 사찰의 경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때에는 종파의 구분이 거의 사라져서 당대의 큰 흐름이었던 선종을 중심으로 여러 신앙 대상이 불교 내에 수용되면서 신라 이래의 유명 산지대찰이 회복되고, 강가나 해안가의 주요 교통지역에 사찰이 창건되는 현상을 보인다. 다만,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국가 내외의 혼란으로 불교의 종교적 기능이 쇠퇴하면서 여러 신앙 대상이 습합되며 지속적인 변모를 꾀하지만, 대부분의 사찰들은 그 위세가 쇠잔해 진다. 그러나 왕실과 연계된 사찰은 그 위세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용주사(龍珠寺)의 경우는 융릉(隆陵)의 원찰로서 이 때에 새로이 창건되는 드믄 예로써 당대의 왕실의 불교에 대한 자세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이와 같은 불교의 끊이지 않는 생명력은, 정치와 사상에 의해 탄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신앙의 대상으로써 영속하고 있는 불교의 영향력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조선시대 건축의 이해(김동욱,1999,서울대학교출판부),한국건축사(대한건축학회,1996,기문당),한국건축의 역사(김동욱,2001,기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