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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궤의 재현임란이후의 성곽강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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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이후의 성곽강화론

평상시 거주하는 읍성(邑城)과 유사시를 대비한 산성(山城)의 이원 체제는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어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로 이어진다. 그 사이 몽고의 잦은 침입과 왜구의 해안가 약탈이 있었으나 성곽(城郭) 제도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17세기를 전후해서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는 중 왜군의 진격로에 있던 읍성들의 방어벽이 쉽게 무너졌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기존 성곽 제도의 장단점을 논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임란 발발 후 선조(宣祖, 1552-1608) 말년까지 거의 전국의 산성이 수축되었다. 지금 지방 각지에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대부분의 산성이 바로 이때 손질된 것들로서 이 시기의 산성에 대한 의존도는 여전히 높았다. 그런데 문제는 전쟁이 났을 때 산에 들어가 항전하는 방식에 의존하다 보니, 평상시 거주하는 읍에는 이렇다 할 성곽을 갖추지 않거나 읍성이 있다고 해도 그 방어 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아 결국 산성의 발달은 상대적으로 읍성의 위축을 초래하였다.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임진왜란 당시의 재상으로 전쟁이 소강 상태에 들어서자 사회의 안정을 되찾는 대책을 마련하는 동시에 국토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몇 가지 방안을 제안하였는데, 그 주요 내용은 산성의 보수와 읍성의 방어시설 강화였다.
특히 읍성에 치성(雉城)을 쌓고 중국의 병서를 참고한 옹성(甕城)과 현안(懸眼), 양마장(羊馬墻), 포루(砲樓) 등 새로운 시설을 갖출 것을 구체적으로 제안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을 벌인 조헌(趙憲, 1544-1592)이나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귀환한 강항(姜沆, 1567-1618)도 각기 중국과 일본의 성제(城制)의 장점을 들어 우리나라 성곽의 개선안을 내놓았다.
유성룡과 조헌, 강항은 공통적으로 기존의 읍성이 너무 넓고 큰데다 방어할 만한 시설이나 지리적 이점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산성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산성 의존에서 벗어나 읍성의 적극적인 강화 방안을 제안하였다.

17세기 중반의 실학자 반계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은 '반계수록(磻溪隨錄)'에서 조선의 산성이 평상시 거주하는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서 백성들이 위급한 때를 당해도 산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평상시 백성들을 훈련시키지 않고 다만 멀리 험한 산 속으로 피신만 하므로 성밖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피려고 하지 않으니, 쇠로 쌓은 성인들 어떻게 지킬 수 있겠는가 하고 반문하였다. 결론적으로 그의 주장은 읍에 거주하는 주민의 수를 늘리고 그들의 경제 활동을 장려해 읍을 부유하게 해야 한다는 것으로 수원 신읍치 일대에 읍성을 축조하여 읍치를 옮겨 설치한다면, 성 내외에 1만 호를 수용할 수 있는 대번진과 대도회로서 위용을 갖출 수 있을 것이라고 이읍과 축성의 필요성을 제안한 것이다.
그의 주장은 18세기에 와서 현실로 이루어졌고, 많은 읍성들이 개축되었다. 그런데 화성 축성은 임란이후 강화된 성곽으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능침과 행궁을 수호하고 수원유수부가 신흥 대도회로 발전할 수 있는 행정적, 군사적 거점으로 나아가 정조(正祖, 1752-1800)의 강력한 왕권 강화의 상징물이기에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 하겠다.



참고문헌 : 실학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 수원화성(김동욱,2002,돌베게),2002 제 3회 정기학술발표회(사단법인 화성 연구회),한국건축사(윤장섭,2002,동명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