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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궤의 재현산성론(山城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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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론(山城論)

우리나라는 평상시 도성에 살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산성(山城)으로 피난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주변에 중국과 같은 강대국과 접하고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산이 많은 지형 조건을 살린 산성이 적의 침입을 막는 데 절대적으로 유리하였다. 물론 산성을 쌓기 위해서는 그 산에 먹을 물이 충분히 있어야 하고, 또 많은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골짜기가 잘 발달해 있어야 하는데, 다행히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조건을 모두 갖춘 산이 전국 어디에나 있었고, 서울 주변뿐만 아니라 지방 대부분의 도시에는 평상시 거주하는 읍성(邑城) 주변에 산성이 마련되어 유사시를 대비하였다.

이름 그대로 적의 접근을 막기위해 자연적으로 형성된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주로 산정(山頂)이나 구릉지에 견고한 성벽을 만드는 산성은 위와 같이 우선 도성이나 읍성의 근교에 위치하여 그 도읍의 전초 기지 또는 유사시에는 농성하여 항전하는 전략적 기지로서의 산성과 이와는 달리 변방이나 교통 요충지 또는 전략적 기점이 될 만한 곳에 들어서는 산성의 두 가지 형태를 갖는다. 거주민과는 관계없이 순전히 군사적 목적으로 쓰이는 성은 위치에 따라 평지에 쌓은 평성(平城)이나 해안성(海岸城), 강변성(江邊城)으로 구분할 수 있다.

산성의 전통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평양의 대성산성(大城山城)이나 경주 주변의 남산성(南山城)과 선도산성(仙桃山城), 한강 주변에 있는 아차산성(阿且山城), 이성산성(二聖山城) 등은 대표적인 삼국시대 산성들이다. 고구려 장수왕 때의 가장 험준한 지형을 이용한 대성산성은 산성지가 현재도 남아있다. 백제는 도성 근방에 준험한 산곡(山谷)을 이용하여 산성을 따로 만들어 전란시의 피난처로 삼았다. 외침방비를 위한 산성과 도시가 분리되어 있어서 방비에 불합리한 점이 적지 않았다. 결국 결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사비성(泗?) 안에 부소산성(扶蘇山城)을 만들고, 시가지를 포함하여 축성함으로써 한국의 산성식과 중국의 시가지 포위식 축성법의 절충형을 만들었다. 신라는 모두 화강암으로 된 산정부분에 있는 곡지(谷地)를 활용하여, 견고하고 높은 석축으로 성벽을 둘러 쌓았다. 성 안에는 평지와 몇 개의 계곡이 포함되어 있으며, 샘물이 있어 식수를 얻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삼국시대 산성들에서 나타나는 성곽제도의 공통점은 우선 산성을 기본방어수단으로 이용하였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옹성(甕城), 적대(敵臺), 치(雉), 암문(暗門)들을 비롯한 여러 가지 방어 시설물들이 창안되었으며, 둘째로 석성을 기본으로 했다는 점이다.

고려시대에는 몽고의 침입 때 수많은 산성이 축조되었으며, 군현들에서는 산성이나 바다 속의 섬으로 들어가서 보전하였다고 한다. 고려 말기에는 화약과 화포의 발달로 인해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화포에 대비하여 성벽도 견고하게 축조되어야만 했다. 이후 조선시대의 도성은 조선 전기까지 도성 서쪽의 강화도를 피난처로 삼았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치르고 난 후에 도성 남쪽의 방어를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그 결과 인조(仁祖, 1595-1649) 때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수축이 이루어졌다. 이어서 숙종(肅宗, 1661-1720) 때에는 도성 북쪽 험준한 산세를 살린 북한산성(北漢山城)이 축조되어 남쪽과 북쪽. 그리고 서쪽에 방어처가 구축된 셈이었다.
산성은 우리나라의 지형 조건과 주변 나라와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산물로서 이것은 우리 민족이 주변 강대국에 완전히 복속되지 않고 독립된 국가를 유지해 나갈 수 있었던 한 요인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는 흔히 '산성의 나라'로 불리어진다.



참고문헌 : 실학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 수원화성(김동욱,2002,돌베게),2002 제 3회 정기학술발표회(사단법인 화성 연구회,2002),한국건축사(윤장섭,2002,동명사),한국건축대계7 석조(장기인,1997,보성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