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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궤의 재현화성의 발굴과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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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 발굴과 복원

19세기 까지 화성의 보수(補修)는 책임있게 이루어져 적어도 19세기 말까지는 처음 지어졌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19세기의 주요한 수리(修理) 공사로는 헌종14년(1848)과 그 이듬해에 있었던 공사로 성곽 여러 곳이 파손되거나 무너져서 대대적인 손질이 필요한 상태였다.
이 해의 수리는 크게 개건(改建: 다시 짓는 것)한 곳과 중수(重修: 전면적으로 수리한 것)한 곳, 개축(改築: 다시 쌓는 것)한 곳과 수보(修補: 경미하게 손질하는 것)한 곳으로 나뉘었다.
다시 지어진 건물로는 화홍문(華虹門)과 북수문(北水門), 매향교(梅香橋), 남창교(南昌橋)가 있었고, 이들은 모두 수원천(水原川)과 연관된 건물로 하천이 몇 차례 범람해서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건물을 다시 지은 것이다. 전면적으로 수리한 곳은 팔달문(八達門)과 각건대(角巾臺),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남암문(南暗門), 화양루(華陽樓)와 서적대(西敵臺), 서포루(西鋪樓)였고, 장안문(長安門) 동쪽 돌층계는 일부가 주저앉았기 때문에 다시 쌓았다.
경미하게 수리한 곳은 남북 옹성(甕城)과 창룡문(蒼龍門), 동장대(東將臺),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 서포루(西砲樓) 등 16군데에 달하였다. 그리고 저수지인 축만제(祝萬堤)를 크게 고쳤다.

이듬해인 1849년에는 건릉(乾陵)의 정자각 10칸을 비롯해서 비각(碑閣)과 향대청 등을 수리했고 현륭원(顯隆園)의 비각과 재실(齋室), 북신문(北神門) 등을 고쳤으며, 두 무덤의 홍살문(紅箭門)을 다시 세웠다. 또한 축만제와 화성 성곽의 여장(女墻) 부분을 상당 부분 개축했으며 암문(暗門)의 일부도 수리하였다.
고종(高宗, 1852~1919.1.21)이 즉위한 후에도 무덤의 보수와 화성행궁의 수리가 이루어졌다.
이처럼 19세기에는 화성의 여러 부분에 꾸준히 수리와 보수가 행해졌고 그로 인해 본래의 모습을 지켜 나갈 수 있었다. 이후 화성성곽은 1935년 고적(古蹟) 제 14호로 지정되었다가 1963년에 사적(史蹟) 제 3호로 재지정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화성은 일제 강점기 동안 철저히 파괴되고 성곽은 방치된 채 곳곳이 무너지고 훼손되었다. 이후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시가지에서도 전투가 벌어졌고 성곽 일대가 폭격의 대상이 되었다.
수원 성곽 수리는 1964년부터 부분적으로 이루어지다가 1968년 성내외 각 20m 거리군을 보호구역으로, 수원시를 관리 단체로 지정하면서1974년 정부의 국방문화유산(國防文化遺産) 정비계획(整備計劃)에 따른 예산 지원에 의해 5개년에 걸쳐 대대적으로 수리되었다.
정비는 크게 없어진 건물의 복원, 무너진 곳의 보수, 그리고 주변 정화 사업 등 세 가지로 구분되었는데, 지상의 구축물 중 목조건물로서 원 상태로 남아있는 것은 팔달문과 화서문(華西門) 및 옹성, 동장대, 화홍문, 방화수류정 등이고 그 외는 거의 소실되고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복원은 장안문과 창룡문 문루를 비롯해서 각루(角樓) 3개소, 포루(鋪樓) 5곳, 포루(砲樓) 5곳, 공심돈(空心墩) 1개소 등 중요한 시설들이었으며, 특히 성벽의 상부인 여장은 전체 성벽 5.4km 중에 4.5km나 복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주변의 정화 사업은 성벽에 인접해 있는 민간의 주택을 사들이고, 순환도로의 개설과 하수도 정비, 나무 심기 등으로 이루어졌다. 이 정비 계획은 1979년 당시 32억 8,000만 원이 들어가는 거대한 사업이었다.
수원 성곽이 본래 축성 당시와 같은 모습으로 복원될 수 있었던 것은 결정적으로 '화성성역의궤'라는 기록이 발간되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와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실측도, 신증여지도서(新增與地圖書), 택리지(擇里志) 등도 참고가 되었다.
수원은 성곽의 정비 사업이 끝난 1979년 이후 급격하게 성장했다. 만약 1970년대에 성곽 정비와 성곽 주변의 건물 신축을 억제하는 행정 조처를 하지 못했다면 화성의 찬란한 유적은 아마도 지금처럼 남아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복원 정비 사업에 의해 화성은 옛 모습을 거의 회복하였고 다만, 팔달문에서 서쪽으로 약 200m 구간과 동남각루(東南角樓) 사이의 약 400m 구간은 남문시장이 들어서 있어서 복원되지 못하였다. 이 구간에는 적대와 남수문(南水門), 남암문(南暗門), 그리고 남공심돈(南空心墩)이 그 모습을 갖추고 있었는데, 앞으로 이 부분들에 대한 복원이 우리에게 남은 과제일 것이다.



참고문헌 : 실학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 수원화성(김동욱, 2002, 돌베게),수원성복원정화지(경기도,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