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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궤의 재현행궁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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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궁제도

행궁(行宮)은 왕이 항상 기거하는 도성의 궁궐을 떠나 임시로 머무는 별궁(別宮)이다. 행궁제도는 그 역사적 기원이 매우 오래되어 이미 삼국시대부터 시행되었으며,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더욱 제도화되어 조선시대에는 여러 가지 목적에 따라 많은 행궁이 건립되었다.
몇몇 행궁은 전쟁과 같은 위급한 상황을 대비하여 지어졌다. 강화행궁(江華行宮), 광주행궁(廣州行宮), 양주행궁(陽州行宮), 전주행궁(全州行宮)이 그 예로, 이들은 왕이 전란을 피해 국정을 돌볼 수 있게 하고 선대 임금들의 영정(影幀)과 왕실일가를 보호하며 왕실의 귀중한 물건과 문서들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다. 강화행궁은 고려시대 대몽항쟁의 근거지였던 강화 고려이궁지(高麗離宮地)에 세워졌는데, 인조5년(1627) 정묘호란을 당해 임금이 종묘 사직의 신주와 대비를 모시고 이곳에 피난하였고 병자호란때에는 세자를 비롯한 왕실일가족이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또 강화행궁에는 장녕전(長寧殿)을 두어 숙종과 영조의 어진(御眞)을 모시었고, 정조5년(1781) 외규장각(外奎章閣)을 세워 강화부에서 전부터 보관하고 있던 중요한 서적들을 비치하였다. 남한산성의 광주행궁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여러 신하들과 함께 머물며 항전한 곳이다. 양주행궁은 숙중37년(1711) 북한산성 성역을 마치고 산성 내에 지었는데, 실제로 임금이 피난처로 이용한 바는 없으나 북한산문고를 두어 실록의 사본, 의궤, 조선 역대 왕들의 옥쇄 등을 보관하였다. 전주행궁은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모신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유사시에 이봉(移奉)하는 처소로서 전주 동쪽 위봉산의 산성 내에 건립되었다.
행궁은 왕이 능행이나 휴양을 위해 도성 밖으로 거동할 때의 거처로도 이용되었다. 임금의 행차는 주로 능원 전배를 목적으로 하였으므로 왕실의 능원이 위치하는 경기도 일원에는 이천행궁(利川行宮), 파주행궁 (坡州行宮), 고양행궁 (高陽行宮), 풍덕행궁 (豊德行宮) 등 여러 행궁이 있었다. 화성행궁(華城行宮)은 현륭원(顯隆園) 전배(展拜)를 위해 조성되었고, 남한산성의 광주행궁도 여주 영릉(寧陵) 및 광주 헌릉(憲陵) 능행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임금의 거동은 질병치료와 휴양을 위해서도 이루어졌다. 이를 위해 온정(溫井)이 있는 온양(溫陽), 이천(伊川), 고성(高城)과 초수(椒水)가 난다는 청주(淸州), 목천(木川), 전의(全義)에는 왕의 휴양을 위한 행궁이 건립되었다. 특히 온양행궁은 조선 초 세종이래 온천지로 이름나 역대 왕들이 즐겨 찾았는데, 짧게는 일주일에서 길게는 두 달 이상을 이곳에서 휴식과 치료를 하면서 국정을 돌보았다. 왕의 행차에는 여러 날이 소요되기도 하였으므로 그 길목에 잠시 묵거나 쉬어갈 용도로 행궁을 설치하였다. 이들은 주필소(駐?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행차에 소요되는 비품을 미리 비치해 두어 민폐를 줄이고자 하는 뜻을 담고있기도 하였다. 온양행궁을 방문하는 여러 임금들은 과천(果川), 수원(水原), 진위(振威), 직산(稷山)의 행궁에서 유숙하였다. 또한 화성 행차 길에는 과천과 시흥(始興)의 행궁이 숙소로 사용되었고, 사근참(肆覲站), 안양(安陽), 안산(安山) 등지에 쉬어갈 곳이 마련되었다.



참고문헌 : 서울학번역총서 궁궐지2(윤한택 외,1996, 서울학연구소),국역 조선왕조실록(서울시스템주식회사),국역 증보문헌비고(세종대왕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