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화성의궤의 재현조운(漕運)제도

연관목차보기

조운(漕運)제도

조운제(漕運制)란 지방 군현의 세곡 수납에 있어 지역을 정하여 수납한 세곡을 국가가 설치한 조창(漕倉)에 모아두었다가 일정한 시기에 국가가 관리하는 선박에 실어 해로(海路) 혹은 수로(水路)를 통하여 수도에 있는 경창(京倉)으로 운송하는 체제를 말한다. 조운제의 정착은 왕권의 강화와 연관성이 있다. 왕권이 비교적 약했던 고려 초기에는 각 군현이 부근의 포(浦)에서 세곡을 운반하다가 성종(成宗) 때 지방에 12목(牧)이 설치되어 호족에 대한 통제력이 강화되자 포의 명칭을 개정하며 포에 국가의 지배력을 강화하였다. 이어 조운의 수경가(輸京價)를 공정함으로써 세곡 수송을 조직화 하였으며 이 후 부근의 세곡을 수납하여 모아두던 조창(漕倉)을 전국에 13개 설치하여 조운제도를 집약적으로 발전 시켰다. 고려말에 이르러서는 조창제가 동요하면서 국가 재정이 위협 받게 되자 세곡의 운송을 육로로 변경하였으나 육상도로와 운반수단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 상황에서 국가의 세곡은 정상적으로 수취되지 못했다.
조선시대의 조운제는 대체로 고려시대의 것을 복구하면서 시작되었다. 조선 전기의 조운을 개괄해 보면 충남, 전라지방의 세곡은 해로를 통해서 서울로 운송되었고 충북, 경상지방 일부, 강원, 황해 지방의 세곡은 수로를 통해 운송되었다. 조운로는 육상 교통로가 발달하지 못한 상황에서 국가재정 조달을 위한 운송로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이나 바다를 이용한 조운은 항해술 미숙에 따른 조운선의 침몰, 조운 업무를 담당할 인력의 기피현상 등으로 어려움을 지니고 있었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조선과 조운작업을 담당할 인력의 확보, 운하의 굴착, 해로표지의 설치, 운항규칙의 제정 등의 방안을 모색하였다. 국가에서 조운항로를 정비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한편에서는 개인 선운업자들에 의한 사설항로가 점차 개설되고 발달되어 갔다. 왜란과 호란을 전후하여 사회질서가 동요되면서 국가 주도의 조운제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자 더욱 사선의 활동이 활발해져 세곡의 운송마저 선운업자에 의해 대행되는 모습을 보인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이들에 의한 수송이 활발해 지면서 곡물에 물을 타서 늘어난 만큼의 양을 횡령하거나, 운반곡물의 전부 혹은 일부를 가로채거나 선박을 고의로 침몰시키는 등의 부정이 저질러 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폐단이 빈번해지자 영조(英祖)는 조운제를 재건하고자 하였다. 이 때 행해진 조치는 경상도의 세곡을 운반하기 위해 남해안에 조창을 설치하여 전라도 서해안까지 이용하던 조운로를 경상도 남해안 까지 연장했으며 세곡수송이 불편한 삼남지방, 강원도 일부의 세곡을 면포나 마포로 대납하게 하였다. 정조 시대에도 조운제는 개편되어 시행되었으나 선박을 만드는데 필요한 자재수급의 어려움과 선운업자들의 반대 등의 이유로 적극적인 조운정책이 수립되지는 못하였다. 이 후 세곡의 운반에 있어서는 사선의 이용이 유리하다고 판단되어 지방관아의 세곡 운반권은 선운업자에게 넘어갔으며 영조대에 잠시 위축되었던 사설항로는 다시 그 지위를 회복하여 개항 직전에는 전국이 세곡은 사설항로를 이용하여 운반되었고 조정의 통제아래 시행되던 조운제도는 거의 그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참고문헌 : 한국도로사(한국도로공사,1981),조선전기 조운제도 연구(김용곤,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