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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궤의 재현역원(驛院)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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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원(驛院)제도

조선시대의 역제(驛制)는 대체로 고려시대의 것을 이어받아 발전시켰다. 중앙집권적인 군현제도를 추구하던 조선왕조는 역이 차지하는 중추 신경적인 기능을 중요시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역을 정비하였다. 조선 초 역대 왕들은 전국의 역을 서울 중심으로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관리체계의 개편, 역로의 보수 및 개정, 역원(驛員)의 보충, 역전(驛田)경영의 활성화 등에 관심을 보였다. 조선 초기의 역로체제는 역승(驛丞)과 찰방제(察訪制)가 확립되어 가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의 조정을 통하여 정립되어 갔는데 이들은 역을 감독하고 통제할 뿐만 아니라 지방을 순찰하면서 지방 관리를 감독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려시대의 역도(驛道)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언제 완전히 개편되었는지 정획히 알 수 없으나 부분적 개편은 태종 때 이루어졌으며 세종 때에는 전국적인 규모의 역로망을 새로이 조직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조선은 전국에 산재한 538개의 역을 44개의 역도로 편성하였는데 이는 조선의 역로가 역도(驛道)-속역(屬驛)체계에 기반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조선시대의 중앙역은 병조(兵曹)나 승여사(乘輿司)의 지휘를 받은 반면 지방은 찰방이나 역승에 의해 관리되었다. 역로를 관리하는 역승의 폐단이 심해지자 중종 30년(1535년) 이후에는 역승을 없애고 찰방만을 두어 조선후기까지 이어지도록 하였다. 전국의 역은 9등급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역의 등급에 따라 구비해 놓은 마필의 종류와 수가 달랐으며 대부분의 역은 7등로에서 9등로에 속하였다. 공무로 출장하는 관리나 지방의 관찰사, 절도사들은 마패를 지니고 있다가 역마를 사용하고자 할 경우에는 이를 제시하였다.
조선시대의 역제는 조선후기에 이르러 역정(驛政)의 문란, 역마 가격의 급상승, 역민의 과다업무로 인한 업무기피 등으로 말미맘아 그 폐해가 늘어나고 있었다. 특히 공공업무 이외에 개인적인 용무로 역마를 이용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였고 역마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여 역마부족현상이 나타나기 까지 하였다. 결국 개항과 더불어 서구의 선진기술이 도입되면서 교통, 통신의 중심역할을 해오던 역은 근대적 교통통신 기관인 전신, 전화 및 철도, 도로 교통으로 대체 되었다.
원(院)은 원래 공무 여행자의 숙식을 위해 각 주요도로에 실치 된 공공시설이었고 대개 30리에 하나씩을 두었으나 지형조건에 따라 유동성을 두었다. 세종 27년에는 원을 정비, 보완하기 위해 부근 주민 중에서 알맞은 사람에게 책임을 맡기고 원주전(院主田)을 지급하였으나 주요지점에 민간 여행자를 위한 시설인 점막(店幕)이 들어서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원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종 25년(1530)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전국에는 모두 1210개의 원이 있었으며 경상도 468개, 전라도 245개, 충청도 212개, 경기도 117개 순으로 분포하였다.
교통과 관련된 대표적인 시설에는 역사(驛舍), 객사(客舍), 원우(院宇)를 들 수 있다. 역사는 국가정책을 주(州), 군(郡), 현(縣)에 하달하고 공무를 수행하는 여행자에게 마필(馬匹)을 제공하는 등 교통에 대한 실제적인 일을 진행하던 시설이었다. 객사는 군읍(郡邑)에 위치하여 전패(殿牌)와 궐패(闕牌)를 모시고 왕권을 상징하는 도읍의 가장 중요한 건물이었다. 따라서 객사는 공무 여행자들에 대한 편익시설이라기 보다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관리가 그곳에서 숙식하게 함으로서 중앙정부를 의식하고 각 도읍의 수령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렇듯 역사와 객사는 관아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나 원우는 각 도로변에 배치하여 위로는 국왕에서부터 아래로는 일반 백성에서 이르기까지 여행 중에 이용할 수 있는 교통편익시설이었다. 원우는 명칭에 있어서 불교식이 많은 것으로 보아 불교사찰에서 발전된 것으로 추정되며 반관반민(半官半民)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참고문헌 : 한국도로사(한국도로공사,1981),수원시사(수원시사편찬위원회,1996),조선시대 교통건축으로서의 원우에 관한 연구(김종헌,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