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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궤의 재현1.사도세자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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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의 영정 정조의 영정
영조의 영정 영조의 영정

1776년 3월 10일, 조선왕조의 제22대 국왕으로 정조대왕이 즉위했다. 이 날 즉위식 후에 신하들 앞에서 정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이 한마디의 말에 주위는 일순간 조용해졌다. 자식이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거론했을 뿐이지만, 그 자리에 모인 신하들은 공포에 두려움에 떨었고 궁전 내 분위기는 냉랭하게 긴장되었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 있던 신하들 중에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관여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1752년 정조는, 당시 국왕이었던 영조의 손자요,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만인의 축복을 받고 태어났다. 그렇지만 정조는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그가 11살 때 할아버지 영조가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였기 때문이다. 그 때 할아버지 영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자결할 것을 강요하자 어린 정조는 머리에 쓰고 있던 관과 도포를 벗어 던지고 아버지의 몸 위에 엎드려 울며 애원했다.
"할바마마, 아비를 살려주옵소서."
애절한 손자의 간청을 외면한 채 영조는 비정하게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영조의 명에 의해 강제로 그 날의 비극의 장소에서 쫓겨 나가면서도 어린 정조는 발버둥치며 애원했다. 아버지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영괴대 영괴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당쟁(黨爭)'이라고 불리는 권력투쟁의 과정에서 친아버지 영조의 미움을 받아 살해당했다. 사도세자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국왕 영조를 대신해서 주요 국정을 처리했을 정도로 매우 총명하고 똑똑했다. 이 사도세자가 점차 나이가 들자 당시의 권력세력이었던 노론이 그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사도세자는 특정 세력이 권력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의 정치적 관점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모든 당(黨)을 동등하게 보고 같이 등용해야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이런 관점은 그의 아버지 영조의 기본 관점이었던 동시에 그의 아들 정조의 통치 철학이기도 하다. 사도세자는 정확하고 뚜렷한 정치적 관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킬 수 있는 힘이 주어져 있지 못했다.

노론은 집요하게 사도세자를 공격했고 마침내 영조와 사도세자를 이간질하는데 성공했다. 국왕 영조의 입장에서 볼 때, 사도세자는 신하들의 정치적 책략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노론과 반목하면서 소론을 신뢰하는 잘못된 방향을 가고 있었다. 이에 실질적으로 노론을 견제할 만한 현실적 힘도 갖추지 못한 사도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줄 경우 큰 반란이 일어나 조선왕조 자체가 위태로울 있다는 판단 아래 사도세자를 죽이기로 작정했다. 마침내 영조는 1762년(영조 재위 38년) 창덕궁 내의 휘령전 앞뜰에서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요구했다. 이에 사도세자가 땅에 머리를 부딪쳐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허리띠로 목을 맸다. 그러자 신하들이 자결을 만류했다. 이에 영조는 화를 내며 큰 뒤주를 갖다 놓고는 사도세자를 그 안에 가두었다. 한여름 밀폐된 뒤주 속에서 8일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사도세자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린 정조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크게 충격을 받았고, 말할 수 없는 애통한 마음을 경험했다.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죽이는 참혹한 현장을 목격하고서도 그것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어린 정조의 가슴 깊숙이 자리잡았다. 따라서 그는 가슴에 사무친 슬픔을 죽도록 간직한 채 평생을 살아야만 했다. 특히 정조는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삼종의 혈맥' 을 잇기 위해서라도 할아버지 영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이지 못했을 것이라는 자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정조는 스스로를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하늘을 꿰뚫고 사무치는 원한을 안고서 죽지 못해 살아 있는 사람이다."
어린 정조에게 사도세자의 죽음은 그만큼 큰 충격이었고 뼛속 깊이 사무치는 가혹한 시련이었다.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정조에게는 평생 불행한 의식이 잠재해 있었다. 정조는 강한 의지로 불행한 의식을 극복해 나갔지만, 때때로 보여지는 그의 언행 속에서 그 점이 뚜렷이 드러나기도 했고, 그의 정치론 속에도 그와 같은 불행한 의식의 단면을 찾아볼 수 있다. 정조의 불행한 의식은 특히 사도세자의 능을 방문할 때 극명하게 표출되었다. 정조는 아버지의 무덤 위에 자란 풀을 부여잡고 울부짖었으며 심한 경우에는 구토 증세까지 보이면서 한없이 슬퍼했다. 그는 슬픔을 참지 못하고 국왕으로서의 체통을 지키지 못한 채 정신을 잃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정조는 국왕에 즉위한 후에도 종종 이렇게 말했다.
"국왕이 된 것이 즐겁지 않다."
이는 상투적인 말이 아니라 그의 내면적 의식을 드러낸 솔직한 심정이었다.

현륭원 전경 현륭원 전경
융릉의 병풍석 융릉의 병풍석

정조는 즉위 후 열흘 후에 죽은 사도세자의 호를 '장헌'으로 높여 부르고 사도세자의 묘소를 '영우원'으로 높여 부르도록 칙령을 내렸다. 또 그 해 8월에 영조의 능을 참배하면서 동시에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했다.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을 막지는 못했지만 사도세자를 국왕의 아버지로 복권시키고자 했다. 그렇지만 이런 정조의 뜻은 노론 세력에게는 심각한 위협이었고, 또 이는 역으로 정조에 대한 반역 또는 암살 위험으로 되돌아왔다. 따라서 정조는 즉위 초기에는 마음대로 사도세자에 대한 자신의 애절한 추도의 마음을 표출할 수도 없었다. 국왕이 된 지 13년만인 1789년에 비로소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성으로 이장해서 마음 속 깊이 남아있던 여한을 풀 수 있었다.


1789년 7월, 영조의 부마이고 정조의 고모부였던 박명원의 제안에 따라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으로 옮길 것을 전격적으로 결정했다. 이미 27년이나 지난 묘소를 옮기는 데 대해 신하들 사이에서는 논란이 많았다. 노론의 입장에서는 어떤 경우이건 사도세자는 거론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미 상당한 힘을 갖춘 정조는 자신의 뜻을 관철했다. 그는 경기도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의 묘소 '영릉'과 더불어 국내 최고의 명당으로 꼽히는 수원 화산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새로운 묘소를 만들어 '현륭원'이라 이름지었다. 정조는 이 묘소에 정성을 다해서 국왕의 지위에 준하는 정도로 화려하게 단장했다. 그때까지는 사도세자를 국왕의 지위에까지 올리지 못했기 때문에 묘를 지키는 돌로 만든 동물의 숫자를 줄이는 등 간소화하기도 했지만, 묘를 둘러싼 병풍석을 설치하는 등 기존의 왕세자 묘소와는 현격하게 다른 격식을 갖추고 당대 최고의 예술가를 동원해서 아름다운 조각을 하도록 했다. '현륭원'이 들어선 수원 화산은 원래 효종의 장지로 추천된 곳이었는데, 기개가 높고 무술이 뛰어난 효종과 매우 닮았던 그의 자손 사도세자의 묘소가 되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옮기면서 특히 가장 크게 고려한 것은 화산에 거주하는 백성들의 이주 대책이었다. 그곳의 백성들은 대를 이어 살던 고향을 강제로 떠나야만 했기 때문에 원성이 높아질 소지가 많았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생각해서라도 원망을 들으면서 묘소를 이전해서는 안 되었다. 정조는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 점을 거듭 당부했다.
"영우원을 옮기기로 결정한 후 내가 아침저녁으로 생각하는 것은 민가를 이전함에 따라 생기는 백성들의 처지이다. 민심이 즐거워야 내 마음도 편할 것이다."
이와 같이 백성을 보살피는 정조의 마음은 단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진정으로 백성들의 고충을 걱정하는 어진 국왕이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옮김에 따라 정든 땅을 떠나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터전을 제공했는데, 그것이 팔달산 아래 새로운 도시 화성(현재의 수원시)이었다. 정조는 수원 부사 조심태에게 명령을 내려 화산에 살던 백성들이 이주할 지역을 물색하게 했고, 조심태는 팔달산 아래의 지역을 추천했다. 이에 정조는 백성들을 그 지역으로 이주시킬 것을 결정하면서 신하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묏자리를 살핀 뒤에는 승지(국왕의 비서)가 대신들과 함께 그곳의 어른들을 불러모아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고 되풀이해 타일러라. 이주한 가구에 대해서도 조정에서 별도로 구휼할 것이니 이 점도 자세히 알려 주어라."
이들 이주민이 정착한 곳이 정조가 치밀한 도시계획에 입각해 새로운 성을 건설한 화성이었고, 이곳은 오늘날까지 수원시의 중심지가 되어 왔다.

융릉의 문인석과 무인석 융릉의 문인석과 무인석

마침내 1789년 10월 4일, 사도세자의 영구(시신)가 영우원을 떠나 수원 화산으로 향했다. 영구가 출발하기전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을 떠올리며 통곡했다. 마침내 영구가 움직였다. 당쟁의 와중에서 정치적 희생물로 바쳐졌던 시신이 27년 만에 국왕이 된 아들과 함께 새로운 안식처로 향했다. 비록 뒤주 안에서 죽었을 당시에는 뭇사람들로부터 냉대 받았던 시신이었지만 이제는 떳떳한 국왕의 아버지로서 웅장한 행렬과 더불어 만인의 칭송과 안식을 기원받게 되었다. 맨 앞에는 경기 관찰사(도지사)가 길을 선도하고 취타수 열여덟 명과 붉은 군복을 입은 4백여 명의 군사들이 세 줄로 늘어섰으며, 국왕을 상징하는 황룡기와 동서남북의 사방기를 비롯해 수많은 깃발들이 창공에 휘날렸다. 정조의 좌우에는 신하들이 예법에 따라 좌우로 늘어섰으며, 사도세자의 영구 주위에는 군사 2백 명이 호위했고 50여 개의 만장이 하늘을 수놓았다. 수많은 백성들이 정조와 사도세자의 영구를 보기 위해 수십 리, 수백 리 밖에서 몰려들었다.


수원 화산의 새 묘소에서 정조는 비운의 사도세자를 기리며 통곡했다. 웅장한 새 묘소에 안장됨으로써 사도세자의 영혼도 안식을 찾을 수 있었겠지만, 살아있는 정조 또한 27년 동안 마음 속에 담고 있던 한을 풀 수 있었다. 정조를 묘소에 예를 드린 후 화산 전체를 둘러보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산의 이름이 화산이니 꽃나무를 많이 심거라."
이후 화산은 말 그대로 꽃의 산이 되었다. 사시사철 꽃과 소나무가 어울려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새 묘소를 '현륭원'으로 이름짓고, 틈만 나면 현륭원을 찾았다. 정조는 다음해 2월부터 사망 때(1800년)까지 무려 12번이나 현륭원을 찾았다. 이는 조선시대 국왕들이 거의 한양성을 벗어나지 않았던 관례에 비추어 볼 때 매우 특이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