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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신하들로부터 지키지 못한 동생

6.신하들로부터 지키지 못한 동생

화성능행도 화성능행도

정조가 즉위한 후 새롭게 나라를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왕에게 힘이 주어져야 했다. 신하가 국왕을 선택하고(중종반정, 인조반정) 권력 이양을 강요하며(경종에 대한 노론의 세제대리청정 요구) 심지어는 왕위계승권자를 죽게 만드는(사도세자의 죽음) 정치과정 속에서 국왕이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정조는 이와 같은 기성의 정치관행을 거부하고 새로운 정치를 추구했다. 그 첫 번째 과제는 국왕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었다.
국왕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정조가 내세웠던 논리가 권도론(權道論)이다. 권도론은 조선시대 사회규범의 이론체계였던 유교의 가르침에 나오는 내용으로서, 특별한 예외적인 상황에서는 원칙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이다.
이 말은 맹자(孟子)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연유한다 : "남녀가 물건을 주고 받을 때 직접 손을 맞대지 않는 것이 예(禮)이지만, 형수가 물에 빠졌을 때 손을 잡아서 건져주는 것이 권도이다."

정조는, 좋은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이따금 원칙과 규정을 벗어난 권도가 발휘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국왕의 권위를 세워 나갔다.
그는 "예에 구애되는 사람은 일을 말하기에 부족하고, 법에 제약받는 사람은 정치를 논하기에 부족하다"고 말하면서 국왕의 정치적 판단력을 존중할 것을 신하들에게 요구했다.
정조의 권도론은 특히 사도세자 문제와 종친문제를 둘러싼 정조와 신하들간의 갈등관계에서 대두되었으며, 정조는 권도의 중요성을 계속해서 강조함으로써 국왕의 권위를 세워나갔다.
먼저, 정조는 사도세자를 복권시키는 과정을 권도론으로 정당화시켰다. 그는 사도세자 문제를 논하지 말라는 영조의 뜻을 이어받는 것을 원칙적으로 수용했다.
선왕에 대한 충성이라는 원칙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사회적 기강이 무너질 뿐만 아니라 노론의 집요한 정치적 반대를 초래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정조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개인으로서 말할 수 없는 애통한 마음"을 표현하면서 아버지와 아들의 정을 강조했다. 인륜의 기초인 효도하는 마음을 버릴 수 없다는 점에서 사도세자의 복권을 권도로써 인정할 것을 신하들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이런 논리 속에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찾았고, 나아가 새로운 묘소를 만들었으며, 화성능행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국왕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정조의 권도론은 종친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강조되었다. 정조 즉위 이후 계속된 역모의 과정에 연루된 이복 동생(사도세자의 서자) 은전군 찬(恩全君 燦)과 은언군 인에 대한 처벌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정조는 형제의 정을 내세워 극형주기를 거부함으로써 국왕의 권위를 세워 나갔다.
사도세자의 셋째 서자인 은전군 찬은 삼대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처벌되었는데, 이 때 신하들은 사형을 주장했었다. 이에 대해 정조는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치 못함을 한탄하면서 처형을 반대했다. 역모사건에 연루된 자는 국법에 따라 사형을 시키는 것이 마땅하지만, 국왕의 친척에 대한 처벌은 국왕과의 관계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은전군의 목숨을 살려야 한다는 정조의 주장에 대해 신하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은전군을 살려줄 경우 국가의 기강이 실추되고 국법이 무너져 나라꼴이 엉망이 된다는 논지였다. 개인적 정에 치우칠 것이 아니라 종사의 막중함을 생각해서 국왕의 동생이라도 화근을 뿌리뽑기 위해서는 처단해야만 한다는 신하들의 반대가 강력했다. 이에 대해 정조는 법의 형식이 아니라 법의 취지를 헤아려 과거 중국의 순(舜)임금의 사례를 들어가면서 은전군의 보호를 주장했다.

결과는, "은정을 끊고 의리로써 결단하라(斷義割恩)."는 신하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은전군의 자결로 마무리지어졌다. 정조는 이 과정에서 정치세계의 비정함과 공적 의리를 내세우는 사대부들의 세력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힘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권도론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고, 국왕의 권위는 논리와 더불어 지지세력의 규합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국왕의 권위를 세우는 권도론은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정조가 즐겨쓰는 논리의 하나가 되었는데, 정조의 권력강화와 더불어 권도론은 정치의 중심에 자리잡을 수 있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정조 집권 중반기에 발생한 역모사건에서 연루된 이복동생 은언군을 끝까지 보호한 정조의 조치이다.

창덕궁 희정당 창덕궁 희정당

1786년(정조10년)에 왕대비 정순왕후는 상계군 역모사건을 공표했다.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 담이 갑작스럽게 죽자 정순왕후는 이 죽음이 독살로 판단되는 의문의 죽음이며, 역모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진짜 역적을 찾아낼 것을 주장했다. 그녀에 따르면, 홍국영이 상계군을 차기 국왕으로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몄었는데 그 잔존세력이 과거의 사실이 누설될까 우려해서 상계군을 독살했다는 것이다.
특히 정순왕후는 이에 깊숙이 개입한 은언군의 죄상을 철저히 조사해야한다고 주장했고 단식을 통해 강력한 의지를 천명했다. 당시 정순왕후는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정조의 이복 동생 은언군을 제거하고자 했다.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단식을 하면서까지 역적의 우두머리인 은언군의 처형을 주장했고 대신들을 독려했다.

은언군 처형을 주장하는 정순왕후의 단식과 신하들의 강력한 요구에 대항해서 정조 역시 단식하면서 상소문을 불태우면서 "나라가 망하더라도 차마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맞섰다.
권력투쟁의 과정에서 희생당한 아버지 사도세자에 이어 하나밖에 없는 동생마저 죽일 수 없다는 완강한 의지를 표명했다.
정조는 은언군의 처형을 요구하는 신하들에 대해서는 대신 이하의 관원을 모두 파직하고 대궐문을 걸어 잠그고 단식하면서 신하들에게 욕설을 퍼붓기까지 하면서 은언군을 필사적으로 보호했다.
결국 당시 영의정 김치인을 비롯한 대신들이 은언군을 제주도로 유배하자는 타협안을 제시했고, 정조는 이 주장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거부하다가 강화도로 귀양보내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 때는 이미 강화도에 은언군의 거처를 마련하고 그 가족들까지 이주시킨 후였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혈육을 가까운 곳에 두고 보호하면서 형제간의 우애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창덕궁 창덕궁

은언군의 강화도 유배 후 정조는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그를 만났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형제의 정 때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하들에게 적용되는 역적의 죄를 종친에게는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국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은언군 유배 후 8년 뒤에 정조는 비밀리에 은언군을 서울로 불러들였는데, 이에 대해 정순왕후와 신하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신하들이 대궐문 앞에 엎드려 읍소했고, 강극성(姜克成) 같은 이는 도끼를 지니고 대궐문 밖에서 "역적 이인(은언군)의 머리를 베어 종묘 사직을 편안히 하지 않는다면 도끼에 엎어져서 죽겠다"고 혈서를 쓰기까지 했다.
이 와중에서 정조는 가마를 타고 궁궐을 빠져나와 경기 감영에서 은언군을 만났으며, 이 사실을 듣고 정순왕후가 가마를 타고 궁궐 밖으로 떠났고, 이에 정조가 은언군을 도성 내 그의 집으로 되돌려 보냈다.

다음 날 정조는 신하들이 모인 자리에서 은언군 문제에 관한 타협책을 제시했다. 즉 매년 한 번씩 데려다 만나되 만나고는 즉시 돌려보낸다는 내용이다.
"이것을 일정한 법으로 삼으면 '공적인 의리'와 '사적인 은정'이 둘 다 행해질 수 있다." 는 것이 정조의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몇몇 신하들이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반대했지만, 정조는 끝내 국왕의 권위와 권도론을 내세워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정조는 이로써 힘을 갖춘 국왕임을 스스로 입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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