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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궤의 재현11.규장각과 학문장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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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규장각과 학문장려

규장각도 규장각도

정조는 1776년 3월 즉위한 바로 다음날에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라고 지시했다.
규장각은 역대 국왕들이 직접 쓴 글을 보관하고 각종 도서를 수집, 편찬하기 위한 기관이었다.
이와 같은 기관은 이미 세조 때에 '어제존각지소(御製尊閣之所)'라는 이름으로 제안된 바 있으나 설치되지 못했고, 숙종 때에 비로소 역대 국왕의 글이나 초상화를 보관하는 작은 건물을 지어 숙종이 친필로 '규장각'이라는 편액을 써서 걸었다. 이 기관을 대대적으로 확대 재편한 것이 정조 때의 규장각이다.
정조 시대의 규장각은 그 이전의 규장각이 맡고 있던 역대 국왕의 글을 보관하는 기능을 넘어서 국가의 정책을 수립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정책 연구 기관의 역할을 했다.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했던 목적은 오히려 세종대왕이 집현전을 설치했던 목적과 같은 것이었다. 정조는 개혁정치의 산실로서 규장각을 설치했던 것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집권 이전에 잘못된 현실 정치를 비판하다가 비참하게 죽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에 세손 시절에는 거의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는 현명함을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정조는 결코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현실 정치에 무관심한 것처럼 본심을 숨기면서도 자신이 즉위할 경우를 대비하면서 정치개혁의 방안을 끊임없이 모색했다. 그렇기 때문에 즉위 다음날에 개혁정치의 산실인 규장각 설치를 지시할 수 있었다.
다만 정조는 새로운 개혁 기관을 설치할 경우 노론세력이 의구심을 품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기존의 규장각을 효과적으로 운용하고자 한다는 것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숨겼다.
정조는 기존의 신하들만으로는 왜곡된 당쟁의 정치구조와 뿌리깊은 부패를 제거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관리의 등용문으로서 과거제도가 정착되어 시행되었지만, 이 또한 기존의 인맥과 연고에 의해 공정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출제관과 감독관, 그리고 응시자 사이에 부정이 만연했던 것이다. 실제로 정조가 세손으로서 대리청정을 시작한 뒤 처음 실시된 영조51년의 과거에서 세 명이 미리 답안지를 숨기고 들어와 부정 합격한 사실이 드러났다.

규장각 현판 규장각 현판

답안지가 미리 작성되었다는 것은 문제가 사전에 유출되었다는 뜻이다.
정조는 부정 합격자들이 답안지를 가지고 입장할 수 있었던 전모를 철저히 밝히라고 예조에 지시했으나 부정 합격자 세 명의 합격이 취소되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되고 말았다.
부정을 비호하는 세력의 뿌리가 워낙 깊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조는 개혁정치의 주체세력을 형성하는 데 과거제도에만 의존할 수 없었다.

정조는 개혁정치의 주체세력으로 때묻지 않은 재야의 선비들을 주목했다. 그는 학식과 덕망을 겸비한 재야 선비들을 모아 이들을 개혁의 논리로 무장시키고 나아가 이들이 개혁정책의 방안을 입안하고 실천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정조는 규장각을 통해 왜곡된 정치구조와 부패한 외척(外戚)과 권신(權臣)을 타파하는 개혁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정조 시대 실제의 현실정치는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개혁정치를 향한 정조의 뜻은 규장각과 더불어 일관되었다.
규장각은 당초 목적과는 달리 정조 즉위 후 5년 동안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했다. 조직과 기능의 미비에 일차적인 원인이 있었지만, 본질적인 원인은 홍국영의 간여에 있었다.
정조의 신임을 받고 있던 홍국영이 규장각을 마치 정보 기구 또는 정적 제거의 도구로 활용함으로써 규장각을 설치한 취지를 희석시키고 말았다.

1781년(정조 5년)에 홍국영이 추방된 후 규장각에 쇄신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후 규장각은 대대적인 정비를 통해 그 기능이 확충되었다.
'규장각'이라는 숙종의 어필 현판이 부착된 것도 이 때였다. 정비된 규장각은 6명의 각신(閣臣)을 중심으로 운영되게 되었다. 제학 2명, 직각 1명, 대교 1명 등 총 6명으로 구성된 이들 각신은 개혁정치를 추진하는 국왕 정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을 수 있었다.

박제가의 암관수도 박제가의 암관수도

규장각 각신은 학문과 덕망을 겸비한 일급 문신들로 정조가 가장 신임하는 인물들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각신으로 임명된다는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각신에게는 많은 특권이 부여되었다. 우선 국왕을 아침 저녁으로 대면할 수 있고, 각종 조정 내 토론에 참가할 수 있었다. 특히 직각(直閣)을 거치면 왕명 없이도 전랑에 추천될 수 있었다.
각신이 다른 신하들의 죄를 청할 수는 있어도 사헌부에서 국왕의 허락 없이 각신의 죄를 청할 수 없었다. 또 형사상 특권도 주어져 공무 중에는 체포ㆍ구금되지 않았다.
각신은 국왕의 가신(家臣)과 같은 우대를 받았다. 이에 규장각은 홍문관이나 승정원보다 국왕과 더 밀착되어 있었고, 언론에서도 사헌부나 사간원을 능가했다. 각신에 대한 이런 파격적인 대우는 다른 신하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이 때문에 이택징(李澤徵)은 "규장각은 전하의 사각(私閣)이며 각신의 전하의 사신(私臣)입니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조 시대를 통틀어 각신에 임명된 사람은 총 38명이었다. 이 중에서 제학에 임명된 사람이 20명이고, 그 중에서 채제공(남인), 이복원(李福源, 소론), 이성원(李性源, 소론), 서명응(徐命膺, 소론)을 제외하면 모두 노론이다.
따라서 당파적으로 구분하자만 노론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그러나 각신들에게는 당파를 초월한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당론을 지키면서도 탕평정치를 비롯한 정조의 개혁정치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규장각을 통해 개혁정치의 추진세력을 형성하고자 했던 정조의 구상이 성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규장각에는 각신들과 더불어 우수한 검서관들이 배치되었다. 특히 우수한 서얼 출신 학자들이 대거 검서관으로 설발되었다. 검서관 직제는 정조 3년 서얼들을 중용하자는 홍국영의 건의에 의해 설치되었다.
초대 검서관에 등용된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서이수(徐理修)가 모두 서얼 출신인 것은 이런 까닭이었다.
여기에는 학식과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얼이라는 이유 때문에 벼슬길에 나서지 못하는 폐쇄적인 사회체제를 개혁하려는 정조의 의지가 담겨 있다.

초계문신제명록 초계문신제명록

정조는 서얼 출신 검서관들을 등용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이덕무와 박제가의 문체는 모두 패관소품(稗官小品) 에서 나온 것이다. 내가 이들을 규장각에 근무하게 한 뜻은 그들의 문장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들의 처지가 남 달랐기 때문이다."
규장각은 학문을 장려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규장각은 설립 초 북경에서 5천여 권의 도서를 구입하는 등 총 3만여 권의 도서를 소장하여 학문 연구의 토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규장각을 통해 신하들을 재교육했다. 과거를 거쳐 관리로 등용된 신하들 중 37세 이하의 사람들을 선발하여 재교육함으로써 그들의 업무 능력을 향상시키고 정신을 재무장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렇게 선발된 사람들을 '초계문신(抄啓文臣)'이라 불렀다.

초계문신은 1781년(정조 5년) 16명을 선발한 것을 시작으로 정조 말년인 1800년까지 10회에 걸쳐 모두 139명이 선발되었다.
이들 초계문신들이 모두 국왕의 친위세력이 된 것은 아니지만, 정약용ㆍ서유구 등 대표적인 실학자들이 초계문신을 거쳐 성장했고 30여 명에 이르는 남인이나 북인계 인물들이 초계문신에 뽑혀 정조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했다.
이들 초계문신들에게도 각종 혜택이 주어졌고 신분이 보장되었다. 이들 중 절반 이상이 청요직에 올랐고, 각신에 임명된 사람도 18명이나 되었다. 정조 후반기에 이르면 주요 관리들의 대부분이 초계문신 출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들 초계문신들에 대한 정조의 관심도 남달랐다. 정조는 한 달에 한 번씩 직접 초계문신들에게 친강(親講, 국왕의 강의)ㆍ친시(親試, 국왕의 시험)를 했으며, 이 때에는 반드시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원칙이 적용되었다.
친강ㆍ친시 외에도 정조는 수시로 규장각에 나아가 이들을 격려했다. 그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초계문신의 교육 과정에 대해서는 일일 보고를 원칙으로 할 정도로 깊은 관심을 보였다.

정조의 각별한 관심 속에서 초계문신들은 정치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국왕의 친위세력으로 성장했다.
물론 초계문신들이 모두 정조의 친위세력이 된 것은 아니다.
이명연(李明淵)과 같이 정조의 정치노선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인물들도 있었으며, 국왕과 대립적인 정치세력을 형성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초계문신들은 정조와 긴밀한 인간적ㆍ정치적 관계를 형성했고 개혁정치의 기초가 되었다. 따라서 규장각과 초계문신제는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규장각과 초계문신제의 성공이 곧바로 개혁정치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정조의 정치개혁은 현상유지를 도모하는 개혁반대파의 저항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열심히 가르치고 배려해준 초계문신들 중 상당수가 기성의 정파적 이해관계 속에 매몰되는 것을 바라보는 정조의 심정은 착찹했다.
또 정조 후기에 이르러 초계문신들이 친왕ㆍ반왕 세력으로 양분되어 갈등을 노정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정조는 초계문신제의 성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초계문신제는 작성의 고심에서 나온 제도로서 20년을 시행했지만 아직도 참된 실효를 거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