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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궤의 재현16.화성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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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성가는 길

돈화문 돈화문
한강철교 한강철교

정조는 개혁정치에 심혈을 기울인 위대한 정치가이자 어진 국왕이었다. 그의 개혁정치는 조선시대의 후기에 찬란하게 빛났으며, 조선이 새로운 도약의 기틀을 세울 수도 있었다는 역사적 가정을 가능케 한다.
비록 정조의 개혁정치는 그의 돌연한 서거와 더불어 후대로 계승되지 못했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커다란 정신적ㆍ문화적 유산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정조의 개혁정치를 깊이 살펴보면, 묘하게도 '화성(華城)'이라는 특정 지역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
학문을 장려하고 우수한 인재를 길러내기 위한 규장각의 책임(제학)을 맡았던 채제공이 화성건설에 앞장섰으며, 군제개혁의 핵심인 장용영의 외영이 화성에 설치되었고, 경제개혁 조치였던 신해통공 또한 화성의 경제와 긴밀한 연관성을 갖고 있었다.

이처럼 정조의 개혁정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던 화성의 의미는 무엇이고 그 지향점은 어디를 향하고 있었을까?
1795년(정조 19년) 윤2월 9일 아침 정조는 화성 행차에 나섰다. 국왕의 행렬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출발하여 보신각 앞길을 지나 숭례문을 통과한 뒤 노량진 배다리에 이르렀다.
지금의 한강대교와 한강철교의 중앙을 통해 한강을 배로 연결한 이 배다리는 정조가 직접 관여하여 48척의 배를 동원하여 11일 만에 완성한 것이다.
배다리를 건너는 동안에 수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이어진 행렬을 따라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정조는 이들의 구경을 막지 말라고 명령했다.

당시의 관습에 따르면 매우 이례적으로 백성들은 국왕의 행렬을 축제 분위기 속에서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다.
한강을 건넌 국왕의 행렬은 노량행궁에 도착했고, 여기에서 점심식사를 끝낸 정조는 어의를 벗고 군복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시흥행궁 터 시흥행궁 터

그리고 나서 그는 가마 대신에 말을 탔다. 장승백이 고개를 넘어 번대방평(蕃大方坪, 지금의 대방동)으로 향하는 정조는 마치 천상의 장군처럼 늠름했다.
이어 정조의 행렬은 시흥현 문성동길(지금의 남부순환도로와 시흥대로가 만나는 길)을 지나 시흥행궁(지금의 금천구 시흥5동 부근)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지냈다.
정조의 화성 행차는 그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를 화성에서 열기 위한 것이었다. 이 행차를 위해 6,000여 명의 사람과 788필의 말이 동원되었는데, 국왕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24개 처의 요지에 배치된 수천 명의 척후 복병까지 계산하면 이날의 행차는 1만여 명의 인원이 동원된 대규모 행사였다.
정조의 행렬은 대략 1km에 달했는데, 수백 개의 현란한 깃발과 기마악대의 연주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었다.

그런데 정조는 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를 도성이 아닌 화성에서 열려고 했을까? 그리고 군복 차림으로 말을 탄 채 행렬을 이끄는 정조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이날 정조의 화성 행차는 실로 대규모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행렬이었다. 행렬에 동원된 6,000여 명의 인원 중 4,500여 명이 오군영의 군사였고, 그 중에서도 3,000여 명은 정조가 직접 창설한 친위부대 장용영의 군사였다.

정조는 오군영 체제로 형성된 당시의 군제를 조선 초기의 군제인 오위 체제로 개혁하고자 했다. 그리고 군제개혁의 핵심에는 새로운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설치가 있었다.
특히 정조는 장용영의 외영을 화성에 설치했고, 장용영 외영 산하에 수원 인근의 군사력을 오위 체제로 통합시켜 나갔다.
따라서 장용영과 화성은 군제개혁의 상징이었고, 국왕의 정치개혁을 뒷받침하는 무력의 상징이었다. 정조는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장용영 군사를 지휘함으로써 강력한 왕권과 뚜렷한 개혁의지를 보이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융릉(사도세자 묘) 융릉(사도세자 묘)

정조는 정통성은 가졌지만 세력이 약한 상태에서 국왕에 즉위했다. 특히 가장 큰 세력으로 자리잡은 노론은 정조에 대해 적대적이기까지 했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불가피한 것으로, 나아가 정당한 것으로까지 주장했던 노론 세력과 정조의 대립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더욱이 노론의 일부는 정조의 즉위를 저지, 방해하기까지 했고, 즉위 초에 시해 사건까지 꾸미기도 했다. 정조는 극단적으로 적대적인 자들에 대해서는 과감한 척결을 단행했지만, 노론 세력 전체를 대적할 수는 없었다.
이에 정조는 탕평정치를 통해 노론의 지나친 독주를 견제했고 각종 개혁정책을 통해 그들의 근거를 약화시켰다.

정조는 즉위 첫마디로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밝혔다. 이것은 홀로 가슴속에 담아왔던 깊은 상처를 드러낸 것임과 동시에 떳떳하게 사도세자의 아들이 되지 않고서는 결코 당당한 국왕이 될 수 없다는 절박감의 표현이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문제를 정당성의 차원이 아니라 부자의 인간적 문제로 제기함으로써 노론과의 극단적인 대립을 회피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서까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도세자를 공개적으로 추모하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소요되었다.
정조는 즉위 후 매년 한 두 차례씩 사도세자의 묘소를 찾았다.

그는 사도세자의 묘소가 국왕의 아버지의 묘소로서는 너무 초라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즉위 후 13년이 지나서야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이장할 수 있었다.
이 때 비로소 정조는 죽은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숨김없이 표현할 수 있었다.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으로 이장하면서 정조는 사도세자의 무덤에 난 풀을 부여잡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다.
이후 정조는 사도세자의 무덤을 찾을 때마다 북받치는 슬픔을 터뜨렸다. 그는 몸을 땅바닥에 던지고 눈물을 한없이 흘렸고 잔디와 흙을 움켜잡아 뜯다가 손톱이 상할 정도로 슬퍼했다.

시흥환어행렬도 시흥환어행렬도

이처럼 사도세자를 향한 정조의 애통한 마음이 여과 없이 표출되자 사도세자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는 노론 세력은 '정치적 원죄'에 따른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위기감은 정조가 다른 군영을 약화시키면서 국왕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강화하면서 더욱 커졌다. 재위 중반기에 장용영은 이미 탁월한 기동력과 조직력을 갖춘 군사조직으로 발전했는데, 조선시대에 국왕이 이처럼 막강한 친위부대를 합법적으로 거느린 것은 태종 등 건국 초기의 몇몇 국왕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던 일이었다.
더욱이 정조는 노론계 신하들이 함부로 나서지 못하도록 경고하는 의미에서 장용영을 거론하곤 하였다. 그는 "장용영을 신설한 것은 본래 깊은 뜻이 있어서였다" 또는 "내 뜻은 장차 기대하는 것이 있다"라는 등의 말을 반복했다. 이 말에 따르면 장용영은 단순히 국방을 위한 군사력이 아니라고 해석될 수 있고, 실제 노론 세력은 자신들이 일시에 제거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다른 한편 정조의 화성 행차는 개혁에 저항하는 기득권 세력에 대해 '천도(遷都) 가능성'을 내비치는 무언의 시위라는 의미가 있다.

도성이 아니라 화성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연 것은, 화성으로 천도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정치적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정조의 실제 생각이 화성으로 천도하려고 했던 것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정조의 화성 행차가 기득권 세력에 대해서는 강력한 압박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정조는 노론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의 근거지인 서울을 떠나 화성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할도 있음을 내비침으로써 개혁정치에 대한 반대 의지를 약화시켰던 것이다. 후대의 몇몇 역사가들이 정조가 노론 세력을 척결할 계획을 가졌었다고 주장해 왔고 화성 천도의 가능성을 제기하는 역사가들도 있지만, 화성 천도 계획을 입증할만한 사료를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정조는 시종일관 탕평정치를 강조했고 노론 세력을 완전히 제거할 생각은 갖고 있지 않았다. 정조는 노론 세력이 자신의 개혁정치에 동조하기를 희망했고 또 그렇게 되도록 유도했다. 이런 차원에서 화성 행차를 바라볼 때 정조는 화성으로의 천도를 구상했다기 보다는 정치적으로 화성을 활용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