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화성의궤의 재현정조와 김홍도

연관목차보기

정조와 김홍도

김홍도는 영조 21년(1745)에 나서 정조 재위 24년간을 지나 순조 6년(1806) 경까지 살았다. 김홍도는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화원(畵員)화가였다. 특히 그는 정조의 절대적인 후원 속에서 한국적인 특성이 두드러진 '김홍도 화풍'을 확립하고, 자신의 화풍을 한 시대의 양식으로까지 확산시킴으로써 동시대와 후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김홍도는 화원의 최대 영광인 어진(御眞)도사(圖寫)작업에 세 차례나 참여했으며, 국왕의 생부 사도세자를 위한 용주사 대웅보전의 후불탱을 제작하였다. 또 전설적인 궁중벽화인 '해상군선도(海上群仙圖)'를 그렸고, 국왕이 화사(畵師)가 지나가는 지역에 특별대우를 명하면서 '금강사군(金剛四郡)'의 명승을 그려 오도록 했을 만큼 그를 아꼈다. 그리하여 화원 출신으로 안기(安奇) 찰방(察訪)과 연풍(延豊) 현감(縣監)을 지내는 등 그 이력도 화려했다. 특히 김홍도는 정조가 화원 서른 명 가운데서 더욱 우수한 자 열 명 정도를 선발해 각별히 우대하면서 운영했던 규장각의 자비대령화원제(差備待令畵員制)에서 조차 특별히 열외되는 대우를 받았고, 오히려 정조 사후 순조 4년(1804)에 자비대령화원에 처음 들어갔다. 즉, 이 당시 김홍도는 최고의 화원으로 특별한 지위에 있어 굳이 자비대령화원 녹취재(祿取材)에서 다른 화원과 경쟁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김홍도는 정조가 가장 총애했던 '대조화원(待詔畵員)'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조는 이에 대해 그의 '홍재전서'에서,
"김홍도는 그림에 솜씨있는 자로서 그 이름을 안 지가 오래다. 삼십년쯤 전에 나의 초상을 그렸는데, 이로부터 무릇 그림에 관한 일은 모두 홍도를 시켜 주관케 하였다. 화원은 관례로 새해 초에 첩화(帖畵)를 그려 바치는 규정이 있다. 금년에 홍도는 물헌(勿軒) 웅화(熊禾)가 주(註)를 붙인 주자의 시로 여덟 폭 병풍을 그렸는데, 주자가 남긴 뜻을 깊이 얻었다. 이미 김홍도가 하폭에 원운시(原韻詩)를 썼으므로, 나는 그에 더하여 화운시(話韻詩)를 썼는데, 눈여겨 보고 감계(鑑戒)의 자료로 삼을 뿐이다." ('홍재전서', "삼가 주자선생의 시에 화운함(여덟수,1800)" 어제시의 협주)
라고 밝혀 김홍도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정조의 배려에 대해 김홍도 또한 "임금께서 미천한 자를 버리지 않으심에 군(김홍도)도 필시 한밤중에 감격하여 울며 보답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 ('표암유고(豹菴遺稿)'권4, "단원기우일본(檀園記又一本")고 그의 스승인 강세황이 기록하였다.
김홍도의 활동 시기는 특히 정조가 세손으로 있던 영조 말년과 그 재위 중인 24년이 중심이 된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어려운 입장을 딛고 왕위에 오른 인물인 만큼 부단한 초인적인 노력을 통해 문무 양면의 훌륭한 교양을 축적하고 있었다. 정조의 제반 정책은 학술과 정치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면서 친위 세력을 육성했던 규장각을 통해 이루어졌다. 특히 규장각에서는 국왕이 젊은 문신을 직접 뽑고 강의하고 시험을 보고 평가했다. 화원세계에서도 규장각 직속의 자비대령화원제가 따로 설치되고, 그 분기별 최종 평가는 국왕이 직접하였다. 이런 제도를 만든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 시기 화원 그림에 끼친 정조 역할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정조는 지금도 전하는 그의 서화로 확인 되듯이 그 자신이 훌륭한 서예가, 화가였을 뿐 아니라 손수 인장을 새겨서 사용할 만큼 뛰어난 예술적 자질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그의 예술에 대한 조예는 군주 일개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화원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큰 변수의 하나였다.
이런 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김홍도의 예술세계는 정조라는 군주와 밀접한 연관 하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하겠다. 김홍도는 철인(哲人)군주, 예인(藝人)군주 정조가 그의 위민정치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가장 신뢰했던 화원이었다, 그러므로 김홍도의 작품에 보이는 소재나 주제면에서 여러 가지 전진적인 성격들은 역시 정조라는 군주의 커다란 울타리 안에서 키워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리라고 판단된다.
그러나 정조가 1800년에 갑작스럽게 승하하자 정치적으로 엄청난 변화와 파장이 일어났다. 정조 사후 벽파세력의 전권이 이루어짐에 따라 남인, 시파 등의 반대파가 숙청되었다. 김홍도 화업의 스승이자 최대의 후원자였던 강세황이라든가, 김홍도를 격찬하는 장시를 남겼던 정범조(丁範朝, 1723-1801) 같은 인물과 정약용, 성해옹 등 김홍도가 친하게 교유했던 인물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남인들이거나 시파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김홍도 또한 정조의 사망과 그에 따른 정국의 변화는 큰 충격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김홍도는 정치 거물도 양반도 아니며, 일개 화원 출신으로 현감을 겨우 지낸 인물이었지만, 다른 화원들과는 달리 정조의 각별한 총애와 비호를 받았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정조 사후 김홍도 역시 생애의 큰 시련을 맞았을 것이다. 김홍도는 이후 정신적으로 시대에 실망하고 육체적으로 노쇠하고 병고에 시달리게 되었다.



참고문헌 : 조선후기 회화의 사살정신 (이태호, 1996, 학고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