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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궤의 재현정조와 채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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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채제공

채제공은 영조 중반기 이후 성장한 남인의 중심인물로서 영,정조기의 가장 예민한 정치적 사안인 사도세자의 사건을 후회한다는 이른바 '금등지사'에 관한 내용을 영조로부터 전수받은 유일한 신하였다. 정조는 "그가 나를 저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그를 저버리지 않겠다."고 할 정도로 정조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정조는 영조의 뜻을 이어받아 그를 형조, 판의금부사, 병조 판서, 좌의정, 영의정의 요직에 앉혀 정조의 탕평정치의 일각을 뒷받침하였다. 정조는 정조12년(1788) 노론 강경파의 공격으로 8년간 은둔생활을 한 채제공을 우의정으로 임명하여 재기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정조14년(1790) 좌의정으로서 행정수반이 되어 3년간에 걸쳐 독상(獨相)으로서 정권을 다루었다.
채제공은 그의 시대를 보수에 대항하는 과감한 개혁이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하였다. 각기 다른 당론으로 인해 갈라진 붕당정치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당파가 없는 큰 단합(탕평정치)을 위해서는 강력한 국왕중심의 통일된 정치를 주장하였다. 즉 탕평정치의 실효는 조정의 사대부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에게까지 적용되어야 하며, 정치적 탕평은 사회적 대동(大同)단결과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우선 인심과 공의가 통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정치에 있어서 실천을 강조하였다. 제도개혁보다는 운영의 개선강조, 중간 수탈제거, 부가세 폐단의 제거들을 추진함으로써 간사한 관리들의 전횡을 시정하고 국가 재정을 확보하는 것을 급선무로 생각하였다. 이러란 그의 사상은 바로 정조의 탕평정치와 국왕 중심의 국정 운용에 대한 입장과 일치하였다.
따라서 정조의 강력한 신임을 바탕으로 하여 채제공은 정조의 뜻을 그대로 정책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이조전랑의 자대제(子代制) 및 당하관 통청권의 혁파와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한편, 장용영체제의 완비, 신해통공조치(1791) 수원화성 건설(1796)등 주요한 개혁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그리고 정조의 특명으로 공노비의 폐단을 바로잡는 절목을 마련하여 점차로 공노비의 수효를 감소시킴으로써 순조1년(1801)의 공노비 혁파를 가능하게 하였다.
채제공은 정조의 탕평정치의 원칙을 현실 정책에 가장 잘 반영한 개혁정치가로 평가되었다. 정조의 각별한 대우를 받았던 정 약용은 제 2의 채제공을 꿈꾸며, 채제공이 1백년 만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명재상이라고 평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점 때문에 사도세자사건, 신해통공, 그리고 그의 제자들의 서학 신봉사건인 진산사건과 관련하여 반대파인 노론 벽파의 집요한 공격대상이 되었다. 정조 22년(1798) 사직하고, 그 후 1년 뒤에 죽자 정조가 직접 제문(祭文)을 지어 사제(賜祭)하였고, 사림장(士林葬)으로 장례가 행해졌다. 저서로는 '번암집(樊巖集)'이 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참고문헌 : 영조와 정조의 나라 (박광용, 2001,푸른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