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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궤의 재현정조 00/05/28(무술) / 과거의 폐단에 대한 윤음을 내리나 경장해 가기가 어려워 실현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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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00/05/28(무술) / 과거의 폐단에 대한 윤음을 내리나 경장해 가기가 어려워 실현하지 못하다

과거(科擧)의 폐단에 대한 윤음(綸音)을 내리기를, “내가 듣건대 정백자(程伯子)의 말에 ‘천하의 일은 크게 변혁하면 크게 유익하고 작게 변혁하면 작게 유익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바야흐로 지금 조정의 큰 폐단은 과거보다 심한 것이 없다. 요행으로 차지하게 되는 사람이 도도(滔滔)하여 한 해가 한 해보다도 심해지고 하루가 하루보다도 심해지고 있으니, 장차는 사람이 사람이 아니게 되고 국가가 국가가 아니게 될 것이다. 이는 어찌 크게 변혁해야 할 바가 아니겠는가? 대저 과거 제도는 옛적부터의 것이 아니다. 옛적에는 인재를 뽑는 방법이 예악(禮樂)으로 그의 재질을 양성해 놓고, 순자(詢咨) 하여 그 중에서 현명한 사람을 뽑았는데, 후세로 내려오면서는 이선(里選)하는 법이 무너지고서 한(漢)나라의 과거 제도가 창시되었었다. 현량과(賢良科)와 효렴과(孝?科)로 길을 나누고, 속식(續食)과 계해(計偕)로 예절을 갖추어 놓아, 비록 선비를 교양하고 현자(賢者)를 높이는 의의가 있기는 했지만, 삼대(三代) 시절에 빈흥(賓興)하던 성대함은 이미 땅을 쓸어버린 듯이 없어졌다. 오로지 사부(詞賦)로 시험을 보임은 수(隋)나라와 당(唐)나라의 고루한 풍습이었고, 여기에다 경의과(經義科)를 집어 넣음은 송(宋)나라와 원(元)나라의 유제(遺制)이기는 하나, 저것은 성운(聲韻)만을 배우게 되었고 이것은 첩송(帖誦)만 능사로 여기게 되었으니, 옛사람의 이른바 ‘날마다 만언(萬言)을 외운다 하더라도 치체(治體)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한 것이 참으로 적확한 논의이다. 황명(皇明) 때에 와서는 역대의 제도를 가감하여, 내외(內外)에 발을 쳐 서로 내통하는 짓을 금단하고, 해를 구분해서 보이는 초시(初試)와 회시(會試)에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의 요체를 책문(策問)하였으니, 당나라나 송나라 때에 오로지 시문을 짓는 재능으로만 뽑던 것에 비하면 요월(遼越)처럼 멀 뿐만이 아니었다. 우리 조정의 취사(取士)도 역시 과목(科目)의 제도이다. 더러는 팔도(八道)의 선비를 모두 모아 널리 보이기도 하고 더러는 단지 관학(館學)의 유생들만 시험 보여 간략하게 뽑기도 하고, 명경(明經)과 제술(製述)로 제도를 구분하기도 하고 초시(初試)와 회시(會試)의 법이 있기도 하고, 증광(增廣)과 식년(式年)으로 명칭을 달리하기도 하고 대과(大科)와 소과(小科)의 명목이 있기도 하여, 법제가 한결같지 않고 명목이 번다하다. 국가에 경하할 일이 있으면 과거를 보여 선비를 뽑는데 취지가 함께 경하하기에 있는 것으로서, 당(唐)나라의 ‘증광(增廣)’이란 명칭을 취택한 것이요, 가을에는 초시를 보이고 봄에는 회시를 보이는 것이 각각 정해진 해가 있는데 황조(皇朝)의 식년제를 본뜬 것이다. 이른바 별시(別試)는 반드시 병년(丙年)에 있게 되는데 더러는 국경(國慶)으로 인해 보이기도 하고, 이른바 정시(庭試)에다 또한 전시(殿試)를 보이고 혹은 초시를 보여 취사(取士)하기도 하는데, 이는 모두가 증광시와 식년시의 대과(大科)와 다름이 없는 것이다. 성묘(聖廟)에 친알(親謁)할 적에는 알성과(謁誠科)가 있고, 혹은 명절(名節)을 만나면 절제(節制)를 보이게 되어 있는데, 이는 진실로 열성조(列聖朝) 이래 관학(館學)의 유생들 위열(慰悅)하기 위한 한 때의 특별한 은전에서 나온 것이다. 명경과(明經科)를 반드시 사서(四書)와 삼경(三經)으로 하는 법을 만들었음은, 대개 경서(經書)에 밝고 조행(操行)이 있는 선비를 구득하게 되고, 또한 선비가 된 사람으로 하여금 반드시 모두 사문(斯文)에 종사(從事)하고 딴 길로 달려가지 않게 하려 한 것이다. 제술과(製述科)를 반드시 논(論)·책(策)·표(表)·부(賦)로 하도록 법을 만들었음은, 논에서는 그의 논의(論議)능력을 보고, 책에서는 그의 시무(時務)에 대한 소견을 보기 위한 것이고, 부에서는 그의 문리(文理) 재주를 취하고, 표에서는 관각(館閣)에 두고 쓰기 위한 것으로서, 정해 놓은 바 제도가 또한 모두 의의가 있는 것이다. 위에서 현명한 사람을 추거(推擧)하여 함께 나라 일을 해 갈 적에도 반드시 이 제도대로 하고, 아래에서 출신(出身)하여 임금을 섬기려고 하는 사람도 또한 이 방도로 했으니, 어떠하든지 과목의 제도는 진실로 조정의 일대 정책인 것이다. 그러나 제도가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오래 되니 폐단이 생겨나고, 명칭이 좋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실지는 효과가 없게 되었다. 조가(朝家)에서 과거를 설행한 것이 전후에 어찌 한정이 있었는가마는 현명한 사람을 구득했다는 칭찬을 듣게 되지 못했고, 출신한 거자(擧子)의 종무(踵武)가 서로 접하게 되었지만 세상에 수용(需用)이 될 만한 인재는 있지 않았으니, 법을 세우고 제도를 정해 놓은 본뜻이 어디 간 것인가? 마침내 폐단에 따라 제도를 고치고 시기를 보아 합당하게 맞추어 가되, 조금은 옛적의 법대로 두고서 고시(考試)의 규정을 엄격하게 하고, 대강 옛적의 제도대로 모방하여 선거(選擧)하는 정책을 닦아 간다면, 이는 어찌 《역경(易經)》에 이른바 ‘변경해 가면 통해지게 되고 통해지면 오래가게 되는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만근(挽近) 이래로는 세태(世態)의 수준이 갈수록 낮아지고, 과거의 폐가 더욱 심하여져서 거자들은 한결같이 분치(奔馳)하려고만 하여 주자(朱子)의 시에 경계해 놓은 것을 생각하지 않고, 거업(擧業)을 세 갈래로 나뉘어져 선유(先儒)들이 교훈해 놓은 것을 깊이 유념하지 않고 있고, 시관(試官)들은 시를 짓는 재능의 감식(鑑識)이 분명하지 못하여 부질없이 동홍 선생(冬烘先生)이란 기롱을 자초하고, 출척(黜陟)이 공정하지 못하여 더러는 홍분방(紅粉榜)을 만들어 내고 있다. 형창(螢?) 아래서 고생을 한 선비는 파수(?水)를 건너는데 흘린 눈물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고, 어(魚)와 로(魯)도 분별하지 못하는 부류들이 도리어 등룡(登龍)의 기쁨을 차지하게 되었다. 과장(科場)에 임하여 거듭거듭 금단해도 마침내 실효가 없어 한갓 국가의 체면만 손상하게 되고, 허다한 폐습을 한결같이 그대로 맡겨 두어 선비들의 추향(趨向)을 바로 잡기가 어렵게 되었다. 비단옷 입은 자제들이 요행으로 한 번 급제하게 되면 재질이나 학문이 어떠한지는 물어볼 것도 없이 화관(華貫)과 현직(顯職)은 그만 저절로 온 것처럼 여기고 있다. 이는 단지 오늘날에 있어서 한심스럽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앞날에 시관(試官)이 되어 선비를 뽑는 일을 또한 장차 이런 무리들의 손에 맡기게 될 것이다. 《송사(宋史)》에 말한 바 ‘못된 종자가 유전된다.’고 한 것과 같은 일이니, 또한 어찌 크게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날의 선비들을 둘러 보건대 과거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인가? 사람이 과거를 더럽히는 것인가? 선비인 사람들이 젊은 때에 바로 마땅히 천하의 정당한 사리를 강구해야 하는 법인데 그만 도리어 문을 닫고 들어앉아 시부(詩賦) 짓기만을 배우고 있고, 학문하는 공부와 심성 방면에 있어서는 울타리 가의 물건처럼 여길 뿐만이 아니었다. 과거의 법이 사람들의 재질을 무너뜨려서 옛적과 같지 않음이 이와 같이 되었다. 양관(楊?)이 이른바 ‘공경(公卿)들이 이런 것으로서 선비를 대우하고 어른과 늙은이들은 이런 것으로 자제들을 훈육하고 있으니, 순박함으로 돌아가고 엄치와 사양을 숭상하는 일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 것이 바로 오늘날을 두고 한 말이다. 아! 취사하는 방법은 향거(鄕擧)와 이선(里選)보다 나은 것이 없고 공령(功令)으로 고시(考試)하는 것보다 좋지 못한 것이 없다. 삼대(三代)의 융성한 시절에는 벼슬하는 길이 두 가지가 있었으니, 향학(鄕學)으로 경유해서 진출하게 되는 경우에는 향대부(鄕大夫)가 관장하여 대사도(大司徒)에 임용되고, 국학(國學)을 경유해서 진출하게 되는 경우에는 대악정(大樂正)이 관장하는데 대사마(大司馬)에 임용되어 육덕(六德)·육행(六行)·육예(六藝)의 교육을 실시하여 빈흥(賓興)하되, 선사(選士)·준사(俊士)·조사(造士)라는 명칭으로 구분하여 작록을 주었으니 오늘날에 이 법을 다시 시행할 수 있겠는가? 과장(科場)에서 간계를 방지하는 방법은 황조(皇朝)의 격옥(隔屋) 제도보다 준엄하게 되어있는 것이 없다. 옥자(屋子)를 매우 든든하게 짓고서 수직하는 군사를 배치하여 왕래하지 못하도록 하고, 고시하는 규정도 내외로 나누어 발을 치고서 안쪽은 고시관이 주관하고 바깥쪽은 감시관이 주관하게 하고, 또한 제조관으로 하여금 총찰(總察)하게 하였다. 오늘날에 이 법을 시행할 수 있겠는가? 대저 과거법이 이미 창시된 이래에 입법한 의미가 매우 좋게 되어 있었던 것은 오직 서한(西漢)의 것이 그렇게 되어 있다. 조정에서 구득하려는 사람은 오직 현량(賢良)한 인재와 효렴(孝?)한 선비인데, 반드시 예절을 갖추어 이리저리 찾아내고, 사자(士子)들이 학습하는 바는 오직 당세의 시무(時務)와 선성(先聖)의 학문이었고, 자신을 팔거나 쓰이기를 바라는 짓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선유(先儒)의 이른바 ‘옛날과의 거리가 멀지 않아 현명한 사람을 찾아내는 요도(要道)를 깊이 얻은 것이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오늘날에 이 법을 시행할 수 있겠는가? 옛적에 과거법을 말해 놓은 것이 매우 많았으나 진실로 주부자(朱夫子)의 공거의(貢擧議)처럼 두루하고 신중하며 자세하고 세밀하게 된 것은 없었다. 그 공거의에 ‘제경(諸經) 및 사서(四書)는 해를 구분하여 시의(試義)하고, 제사(諸史) 및 시무(時務)는 또한 다음 해에 시책(試策)하여, 경서(經書)를 전공한 사람은 가법(家法)을 지수(持守)해 가게 하고, 답의(答義)한 사람은 경사(經史)를 통관(通貫)하게 한다면, 선비로서 경서를 통하지 못한 것이 없게 되고 역사를 통하지 못한 것이 없게 되어, 세상에 쓰이게 될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애석하게도 그 당시에 비록 상문(上聞)하게 되지는 못했어도 천하에서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선유의 이른바 ‘후세의 공거법으로서는 이보다 더한 것이 있지 않았다.’고 한 것이 헛된 말이 아니다. 오늘날에 이 법을 시행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의 과거 폐단은 개혁하지 않을 수 없는데, 개혁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옛 것에 어둡다고 하여 지금의 것에 구애되어도 안되며, 또한 지금의 것에 집착해서 옛 것에 소홀해서도 안된다. 진실로 능히 옛적의 것을 참작하고 지금의 것을 참조하여 이 때에 맞도록 합당하게 해 간다면, 비록 성주(成周) 때의 제도와는 같지 않더라도 자연히 향거(鄕擧)의 의의가 있게 될 것이고, 황명(皇明) 때의 법과는 같지 않더라도 자연히 격옥(隔屋)의 규정이 있게 될 것이며, 서한(西漢)의 법규와는 같지 않더라도 현량(賢良)한 선비와 효렴(孝廉)한 선비를 구득하게 될 것이고, 주자의 공거의와는 같지 못하더라도 경사(經史)를 해를 구분하여 해 가는 규정을 행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과연 옛적의 뜻을 잃어버리지 않게 될 것이니, 또한 마땅히 오늘날에 시행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정부(政府)와 관각(館閣)의 신하들에게 묻는 것이니, 각기 의논하여 올려야 한다.” 하니, 여러 신하의 헌의(獻議)가 참차(參差)되는 것이 많았다. 임금이 초원(初元) 때부터 반드시 과거의 폐단을 통쾌하게 고치려고 했으나 경장해 가기가 어려워 마침내 실현하지 못했다. 【원전】 44 집 585 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