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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궤의 재현서얼허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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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얼허통

영조시대부터 중요한 정치적 쟁점이 된 서얼허통문제는 관직의 수가 양반 수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과, 사대부 집안의 적,서자간의 다툼과 혼란을 이유로 수용되지 못하고 있었다. 정조시대의 서얼허통정책은 "백성은 나의 동포"요,"한 집 식구"로 보는 정조의 백성관에서 비롯되었으며, 유능한 인재를 고루 등용한다는 임용방침에 따라 취해진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정조 1년(1777) 서얼 중에서 "뛰어난 재주를 지닌 선비"와 "나라에 쓰임이 될 만한 사람"을 임용하라는 '서류허통절목(庶流許通節目)'을 공표하였다. 그 실제 적용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서얼허통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선천내금위(宣薦內禁衛)를 중인과 서얼들로 뽑도록 하고,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 서류 출신들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하는 등 적서(嫡庶)에 구애됨이 없이 유능한 인재를 적극 등용하였다. 또한 정조 6년(1771)에는 유임(儒任), 향임(鄕任)에 대해서도 서류를 허통시킬 것을 명하였다. 정조는 정조 9년(1785)에 3조의 낭관(朗官)과 해당관사의 판관과 같은 요직에 서얼을 임명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사대부들의 반발에 따라 '나라일은 평등하게, 그러나 가정에서는 차등있게'라는 원칙으로 정리되었다. 요컨대 적자와 서자의 관계는 사대부 문중의 문제로서 질서유지를 위해 차등을 둘 수도 있다. 그러나 유능한 인재를 고르게 등용해야 하는 국왕의 입장에서 볼 때 적,서자의 구분은 무의미하며, 모두 "같은 핏줄"이요, 국가라는 "한 집안 식구"이기 때문에 결코 차별을 둘 수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