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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궤의 재현수리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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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시설

조선 후기 이앙법의 발달로 수전(水田)이 확대됨에 따라 농업 용수의 확보는 농업 생산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므로 정부는 수리시설을 축조하고 보완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현종3년(1662)에 제언사(堤堰司)를 설치하고,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제정한 최초의 제언(저수지) 규정인 '제언사목(堤堰事目)'을 발표하여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와 지방관이 제언을 감독함으로써 수리시설을 정비해 갔다. 정조시대에는 특히 제언을 통한 수리정책이 활발하게 시행되었다. 정조2년(1778)에는 비변사에서 제정한 '제언절목(堤堰節目)'을 발표하고 정조22년에는 '구농서윤음(求農書윤音)'을 발표하여 수리시설을 통한 농업진흥책을 추진하였다. '제언절목'은 전문(前文)과 11조항의 절목으로 구성되었는데 전문에는 제언수축의 중요성과 제언보호를 위한 수령이나 관찰사들의 직무 소홀을 경계하는 내용이 있고, 절목에는 제언 내에서의 불법경작의 금지, 수문(水門)의 역할을 하는 수통(水桶)의 설치, 보(洑:제언보다 규모가 작음)의 설치, 제언 축조시 노동력의 동원 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구농서윤음'에 응하여 조정에 올린 글에는 제언 축조 기술 등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 이러한 수리정책의 시행으로 저수지가 많이 축조되어 18세기 말 19세기 초에는 전국적으로 저수지가 3천 5백 개 이상 달하여 조선 건국이래 최고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특히 경상도에서 17세기 후반이후 급격히 증가하여 삼남지방 가운데 가장 많았고, 수원 지방에서도 화성(華城)의 축성 후 그 주변에 만석거(萬石渠,1795) 만년제(萬年堤,1798) 축만제(祝萬堤,1799) 등의 저수지가 조성되었다. 제언보다 규모가 작은 보의 축조도 많이 이루어져 18세기말 19세기 초에는 대보(大洑)의 수만 2천 개 이상에 달하였다. 저수지와 보의 축조 이외에도 수문 수갑(水閘:물 빼는 양을 단계적으로 조절할 수 있도록 한 수문장치)의 설치, 용골차(龍骨車)나 용미차(龍尾車)와 같은 수차(水車)의 도입에 관심을 갖고 시험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