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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궤의 재현토지제 개혁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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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제 개혁논의

정조의 토지제도에 대한 인식과 정책방향은 정조 2년에 반포한 탕평교서(蕩平敎書)인 '대고(大誥)'의 '제민산(制民産:백성의 살림사이를 제정함)' 항목에 잘 나타나 있다. 정조는 여기에서 토지문제가 제민산의 출발이 된다며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토지 소유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정전법(井田法)은 훌륭하나 복구가 용이하지 않으며, 토지를 차지하고 있는 세력가들의 반대로 인해 균전(均田)이나 양전(量田)이 시행되지 못한 것이 토지소유 폐단의 원인이라고 보았다. 정조는 토지제 개혁의 필요성과 당위성은 천명했지만 그 구체적인 방안은 제시하지 못하였고, 이후 '대고'는 정조시대에 개진된 여러 토지개혁론의 중요한 근거로 작용하였다. 정조연간에 논의되었던 토지제 개혁론을 살펴보면, 먼저 정조 3년 11월 좌부승지 김하재(金夏材)는 지방에 어사를 보내어 세안(稅案)과 곡부(穀簿)를 바로잡고 공경대부에게는 등급에 따라 토지를 나누어 주며 사서(士庶:사대부와 서민)가 받는 전토에 일정한 한도를 두어 구분전(口分田)이 세습되는 것처럼 하자고 건의하였다. 정조 4년 5월에는 정언 정익조(鄭益祚)가 토지상한제(土地上限制)를 주장하고 이를 어길시는 엄중히 다스릴 것을 제안하였고, 정조 15년 1월에는 백성 박필관(朴弼寬)이 토지소유를 30결(結)을 기준으로 한정하자고 상언(上言)하였다. 정조 18년 7월 부수찬 이석하(李錫夏)는 집권층의 토지집중에 대해 논하고 그 해결 방안으로서 토지 소유를 호적에 밝힐 것을 건의하였다. 정조19년 11월 첨지 양주익(梁周翊)은 토지소유의 균평(均平)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고, 같은 해 부사직 김정국(金鼎國)은 유형원(柳馨遠)의 전론(田論)을 참작하여 공경대부로부터 사서에 이르기 까지 토지를 분등(分等)하여 결수를 한정하자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정조는 토지개혁의 필요성은 절감하면서도 정전법의 복구가 불가능하며 한전법, 균전법의 시행도 쉽지 않음을 인식하고 개혁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을 추진하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개혁반대론을 중요한 방해요인으로 보고 국왕권이 이를 제압하는 것이 개혁의 전제조건이 된다고 인식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정조연간에 이루어 졌던 토지제 개혁논의는 결과적으로는 실제로 정책에 반영되어 실행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