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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궤의 재현읍성제(邑城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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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성제(邑城制)

    읍성이란 지방의 관부(官府)와 주민의 거주지역을 둘러서 쌓은 성으로 종묘와 왕궁이 있는 도성과 구별된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읍성이 나타났는지 아직 분명치 않으나 삼국시대에 지방의 주요도시를 둘러싼 읍성의 흔적이 점차 밝혀지고 있고, 통일신라 신문왕 때 9주(州) 5소경(小京)에 읍성이 축조되었던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주요지방도시에 읍성이 축조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토축이 점차 석축(石築)으로 고쳐지거나 거주 인구의 증가로 넓게 고쳐지게 되었다. 특히 세종 때부터 해안근처에 읍성들이 새로 축조되거나 고쳐졌는데, 이 때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성벽의 높이를 높이고, 옹성(壅城)의 축조와 치성(雉城), 해자(垓子),성지(城池) 등 읍성의 부대시설을 설치하도록 중앙에서 감독하였다. 조선시대의 읍성은 내륙지방에는 비교적 큰 고을에만 있었고 해안 근처 고을에는 거의 모두 분포하였으며 행정구역 등급에 따라 규모의 차이가 있었다. 영조 후반에 간행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전국에 104개소의 읍성이 기록되어 있다. 현존하는 읍성으로는 동래읍성, 해미읍성, 비인읍성, 남포읍성, 홍주읍성, 남원읍성, 고창읍성, 흥덕읍성, 낙안읍성, 진도읍성, 경주읍성, 진주읍성, 언양읍성, 거재읍성 등이 있는데 조선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읍성은 정조때 축조된 화성(華城)이다. 수원 화성은 옹성, 치성, 해자 등의 전통적 읍성제를 따르면서도 새로운 방어시설로 공심돈(空心墩), 포루(砲樓), 노대(弩臺), 오성지(五星池) 등을 갖추어 읍성과 방어성으로서의 다양한 기능을 가졌다. 또한 화성은 산지대는 산성과 같이 읍성을 쌓고 성 안에 도시가 형성되도록 하여 경주성과 같은 방형(方形)의 읍성 형태와는 달랐다. 성곽 건축 기술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석축에 중국식의 전축(塼築)을 조화시킨 발전된 형태였다. 이처럼 수원 화성은 읍성과 산성의 기능을 복합적으로 갖추고 건축 기술면에서도 발전적인 조선 후기 대표적인 읍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