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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나타나는 우리 꽃

꽃의 의미

꽃은 한국의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역사기록에 남겨진 꽃에 관한 기록이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한다. 백제를 고대국가 단계로 발전시킨 고이왕(古爾王)은 금꽃으로 오라관(烏羅冠)을 장식했다. 금화식오라관(金花飾烏羅冠)은 금화(金花)로 장식한 검은 비단의 관(冠)이다.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관을 꾸민 오라관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 백제왕의 관모에 붙이던 꽃 모양의 장식은 납작한 금판(金板)에 구멍을 뚫어 화염형(火焰形)의 모양을 나타낸 것으로서 한 쌍으로 되어 있다. 무녕왕(武寧王)의 왕비의 것도 그와 비슷한 금화 한 쌍이 있다. 백제의 관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은으로 만든 꽃으로 관을 꾸몄다.

이런 전통은 고려시대에도 계승되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왕성을 지키는 친위군장들은 금화(金花)로 장식한 모자를 썼다. 이것은 중앙군의 위엄을 상징하였을 것이다.『고려사(高麗史)』는 금화장식이 된 모자를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게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들도 임금이 하사한 어사화를 받았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꽃이 상징하는 의미는 대부분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 많은데, 이는 우리문화가 중국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관상식물에 있어 중국에서 도입된 식물이 많았기 때문에 그 도입과 함께 꽃말이 전래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모친절로 알려진 5월 두 번째 일요일인 어머니날에는 카네이션 대신에 원추리 꽃을 선물하곤 한다. 이 꽃이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자애로운 어머니’라는 뜻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았던 우리나라에도 원추리가 가진 상징적 의미가 보인다. 원추리가 어머니를 상징한다는 것은 중종 31년(1536) 10월 28일 강원도 관찰사 윤풍형(尹豊亨)이 병든 어머니를 모시려 체직을 청하는 상소에서 잘 알 수 있다. 이 글에 “신(臣)의 어미는 지금 82세여서 북당(北堂)에 시드는 봄의 원추리요 서산(西山)에 지는 저녁 해와 같으니 신(臣)이 모시고 살 날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라고 한 예로 알 수 있다.

〈양화소록〉은 “우리나라의 명화(名花)는 모두 본국의 소산이 아니고 고려 충숙왕(忠肅王)이 원나라에 들어갔다 돌아올 때 원의 황제가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양화소록〉의 화목(花木)에 대한 기록이 중국의 문헌에 있는 기록을 많이 인용하고 있는 것이나 〈산림경제(山林經濟)〉의 참고문헌 55권 가운데 35권이 중국문헌임을 볼 때 꽃 문화에 있어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으로 꽃은 우리나라에서 불교와 관련하여 그 의미가 드러나고 있다. 꽃은 불교에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공덕을 기원하는 불교의식에서 사용되었다. 불전헌공화는 삼국시대에 중국을 통해 불교와 함께 유입되었다고 보여진다.

이 밖에도 불전에 꽃을 바치는 방식에는 산화(散花)가 있었는데 이는 꽃을 그릇에 담아 손으로 뿌리는 방식을 말한다. 이러한 산화의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비천상(飛天像)이 있다. 고구려 벽화 가운데 안악(安岳)제 2호분의 『비천도 (飛天圖)』는 가장 뛰어난 벽화로 평가받는데 천녀(天女)는 연꽃의 꽃잎을 둥근 쟁반에 가득 담아 하늘을 향해 가볍게 날리면서 매장자가 있는 방향으로 꽃을 뿌려 공양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처럼 꽃을 뿌리는 행위는 환영과 찬양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음에서는 꽃이 역사에서 가지는 의미와 상징을 몇 가지로 분류하여 살펴보았다.

약재로 쓰인 예

약재로 쓰인 예로 개나리가 있다. 개나리에 달린 열매인 연교(連翹)는 조선시대 임금님의 병을 다스리던 귀중한 약재로 쓰였다. 연교는 성질이 차고 종기의 고름을 빼거나 통증을 멎게 하고, 살충 및 이뇨 작용을 하는 내복약으로 쓴다고 알려져 있다.

다음으로 나팔꽃이 있다. 나팔꽃은 네팔, 히말라야가 원산지인 듯하며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와 널리 퍼졌다. 나팔꽃은 원래 씨앗을 약으로 쓰기 위해서 들여온 것이라고 한다. 나팔꽃 씨앗은 견우자(牽牛子)라고 하며 하제(下劑)구실을 하는 가정상비약으로 써왔다.

나팔꽃씨(牽牛子)는 『세종실록』 지리지에 약재로 기록되어 있어, 조선초기에 이미 나팔꽃이 우리나라에 자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방에서는 푸르거나 붉은 나팔꽃 씨를 흑축(黑丑), 흰 나팔꽃 씨를 백축(白丑)이라고 한다. 견우자는 대소변을 통하게 하고 부종 · 적취(積聚: 오랜 체증으로 배 속에 덩어리가 생기는 병) · 요통에 효과가 있다.

한편으로 조선시대에는 맨드라미꽃(鷄冠花)이 재배하는(심는) 약재로 사용되었음이 『세종실록』 지리지의 경기도, 경상도, 황해도 조에 보이고 있다.

이와 함께 민들레꽃도 약재와 관련되어 쓰였다. 한방에서는 민들레의 뿌리와 꽃 피기 전의 전초(全草)를 포공영(蒲公英)이라 하며 해열 · 소염 ·이뇨 ·건위의 효능이 있다고 한다. 감모발열(感冒發熱) ·인후염 · 기관지염· 임파선염 · 안질 · 유선염 · 간염 · 담낭염 · 소화불량 ·소변불리 ·변비의 치료제로 사용한다. 또 뿌리와 줄기를 자르면 하얀 젖 같은 물이 흘러서 민간에서는 최유제(催乳劑)로 이용하기도 한다. 민들레는 맛이 쓰면서 위의 소화기능을 강화하는 약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봄철에 어린잎은 나물로 이용하며 성인병 퇴치에 좋은 산채(山菜)로 알려져 있다.

다음으로 작약이 있다. 작약의 뿌리는 진통 · 복통 · 월경통· 무월경 ·토혈 ·빈혈 · 타박상 등의 약재로 쓰인다. 고려 문종(文宗) 때인 1079년에 중국 송나라에서 서경(西京)의 적작약(赤芍藥)을 고려에 약품으로 보낸 것으로 보아, 약재로 쓰인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기록인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작약이 경상도와 전라도, 강원도, 함길도의 약재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 함께 제비꽃이 약재로 쓰였다. 제비꽃과에 속하는 다년생풀인 제비꽃과 호제비꽃의 전초를 말린 것을 자화지정(紫花地丁)이라 한다. 『동의보감』은 약초의 꽃이 자색이고 줄기가 마치 단단한 못과 같아서 자화지정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여름에 전초를 뜯어 그늘에서 말린다. 맛은 쓰고 매우며 성질은 차다. 약리실험에서 억균작용, 소염작용이 밝혀졌다. 부스럼, 단독, 헌데, 연주창, 유선염 등에 쓴다.

다음으로 창포꽃이 약재로 쓰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창포(菖蒲) 또는 창포말(菖蒲末)은 『세종실록』 지리지에 경기도 · 충청도· 경상도 ·황해도 · 함길도의 약재로 나오고 있다. 『동의보감』에는 창포가 심장의 구멍을 열고 오장을 보하며 이목을 밝히는 등의 효능이 있다고 한다. 거담(祛痰), 건위(健胃, 진경(鎭痙) 등에 효능이 있다 하여 한방에서 많이 사용된다.

찔레꽃 역시 약재와 관련된 꽃이다. 찔레는 어느 것 하나도 버릴 것이 없을 정도로 약으로 사용된다.『세종실록』지리지에 찔레씨(?梨子)가 약재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찔레나무는 한방에서 약으로 사용하며 꽃은 ‘장미화(薔薇花)’라 하여 이것을 잘 말려 달여 먹으면 갈증을 해소하고 말라리아에 효과를 볼 수 있다. 뿌리는 이질, 당뇨, 관절염 같은 증세에 복용할 수 있다. 열매는 불면증, 건망증 치료에 좋고 각기에도 효과가 있다.

한편 철쭉꽃이『세종실록』지리지에는 전라도와 황해도, 평안도의 약재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할미꽃(白頭翁)이 『세종실록』 지리지에 전라도와 황해도 평안도, 함길도(함경도)의 약재로 등장하고 있다.

상징으로 쓰인 예

계수나무는 성품이 온화하고 고결한 사람을 상징한다. 그 잎이 윤나고 매끄러우며, 더러운 곳에서도 흙이나 먼지가 잘 붙지 않는 데서 생긴 상징성 때문이다. 이러한 계수나무는 과거시험의 합격과 연관하여 등장한다. 계수나무 가지를 꺾었다는 것은 문무과에 합격했음을 비유한 것이다. 한편으로 임금의 죽음을 슬퍼할 때에 계수나무 그림자라는 글귀를 쓰기도 하였다. 선조(宣祖)가 돌아간 후 왕의 애책문(哀冊文)에 “계수나무 그림자 요전(瑤殿)에 쓸쓸하는 구절로 이를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나리꽃(백합)이 있다. 나리는 백합(百合)의 순수한 우리말로 장미, 국화와 함께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전세계적으로 사랑받는 꽃이다.

나리는 전통미술품인 책거리도에서 주로 찾아 볼 수 있다. 학문에 정진하여 관직에 오르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그렸던 책거리도에 나리꽃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나리꽃의 상징의미가 벼슬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라 추정된다.

이와 함께 맨드라미가 상징과 관련하여 나타난다. 맨드라미는 아시아, 아프리카, 열대아메리카 등 열대~아열대에 걸쳐 자생하며 사랑 받은 역사가 오래 된 꽃이다. 맨드라미는 동양과 서양이 한결같이 생김새를 닭의 벼슬로 연상하여 이름 붙였다. 영어명인 cocks comb은 수탉의 볏을 뜻한 이름이며 중국명인 계관화(鷄冠花)도 닭의 볏 같은 꽃이란 이름이고 일본명 계두(鷄頭)도 같은 뜻이다. 맨드라미는 닭 벼슬처럼 생겨서 전쟁의 승리를 상징하기도 하며 출세나 진급을 의미하는 경사스런 꽃으로 여겨졌다.

다음으로 앵두꽃을 들 수 있다. 『동의보감』은 앵두는 백과(百果)중에서 제일 먼저 익으므로, 옛사람들이 아주 귀하게 여겨 종묘의 제물로 바쳤다고 했다.『고려사』의 길례대사라는 제사의식에 “4월 보름에는 보리와 앵두를 드린다”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이 전통이 이어져 『세종실록』오례 길례의식조에 ”앵두, 살구를 변(?)에다 담았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으로 앵두는 세종의 아들 문종이 가진 효심과 관련되어 나타난다. 세자인 문종이 경복궁 후원(後苑)에 손수 앵두나무를 심어 익은 철을 기다려 세종께 드렸다. 세종은 앵두를 맛보고 기뻐하며 “바깥에서 올린 것이 어찌 세자가 손수 심은 것과 같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여 문종의 효심을 칭찬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원추리(萱草)를 들 수 있다. 원추리는 우리나라에서 오랜 옛날부터 사랑받아 온 아름다운 화초이다. 원추리는 가을이 지나면 마른 잎이 떨어지지 않고 겨울 동안 새싹이 자랄 때까지 싹을 덮어 거름 역할을 한다. 이런 모습을 엄마가 아기를 보호하는데 비유하여 ‘모애초(母愛草)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부인들이 아이를 가졌을 때 원추리 꽃을 심거나 그 잎을 말려서 차고 다니면 반드시 아들을 낳으며 걱정을 잊을 수 있다는 속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이러한 속설의 기원은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 시인 조식(曺植)이 宜南花訟(의남화송)에서 의남화를 ‘사내아이가 태어날 좋은 징조’, 부부화합, ‘자손번창’으로 찬양하는 글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나라에도 중국의 이러한 관념이 전해졌다. 조선의 회화작품인「화접도」는 원추리와 바위, 나비를 그린 그림이다. 여기서 원추리는 의남(宜男)을 상징하고 나비와 바위는 익수(益壽)를 의미해 ‘의남익수’의 뜻으로 아들을 많이 낳고 오랫동안 장수한다는 길상적 의미를 담고 있다.

다음으로 자두꽃을 보자. 자두의 순우리말은 오얏이다. 자두꽃(오얏꽃)은 『삼국사기』와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에 복숭아꽃과 같이 등장하는 유서 깊은 꽃이다. 자두꽃과 복숭아꽃은 이들 문헌에서 봄을 알려주는 상징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으로 자두꽃은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꽃으로 쓰였다. 1884년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우편업무를 시작한 우정국은 1905년 통신권을 일본에 빼앗길 때까지 보통우표 54종을 발행했다. 대한제국의 문장인 오얏문양이 주로 발행되었으므로 이화우표(李花郵票)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대한제국시기 백동으로 만든 화폐에도 표면의 위쪽에는 오얏꽃, 오른쪽에는 오얏나무 가지, 왼쪽에는 무궁화 무늬를 새겨 넣었다.

다음으로 창포꽃이 있다. 창포꽃은 도랑가에서 자라며, 높이는 30cm 내외이다. 창포꽃은 단오와 관계가 깊다. 고려 가요 『동동(動動)』에는 단오를 ‘수릿날’이라 하였는데 수리란 말은 상(上) · 고(高) · 신(神) 등을 의미하며 수릿날은 신일(神日) · 상일(上日)이란 뜻을 가진다. 여자들은 단옷날 ‘단오비음’이라 하여 나쁜 귀신을 쫓는다는 의미에서 창포를 삶은 물로 머리를 감고 얼굴도 씼으며, 붉고 푸른 새 옷을 입고 창포뿌리를 깎아 붉은 물을 들여서 비녀를 만들어 꽂았다. 남자들은 창포 뿌리를 허리춤에 차고 다녔는데 액을 물리치기 위해서라고 한다.

한편으로 창포 잎이 농사의 시작과 관련하여 등장하고 있다. 고종 8년(1871) 2월 11일에 권농을 위한 반교문(頒敎文)에 “창포 잎이 나고 살구꽃이 피어 농부가 바삐 서둘러야 할 철 이라는 구절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철쭉꽃을 들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철쭉꽃과 관련된 수로부인(水路夫人)의 이야기가 있다. 아름다운 용모의 수로부인이 연분홍빛 철쭉의 그윽한 향기와 어울려 있는 것이다. 철쭉꽃은 수로부인과 대비되어 미모의 여인을 상징하고 있다.

이와 함께 찔레꽃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자라고 있는 찔레나무는 장미 · 야장미(野薔薇) · 들장미 등으로 불린다. 찔레꽃은 귀(貴)함을 상징한다. 조선 중종 때에 공용경(?用卿)과 오희맹(吳希孟)이 명나라 황제의 사신으로 조선에 왔다. 중종이 후원에서 거닐 때, 공용경(?用卿)과 오희맹(吳希孟)이 손으로 홍도(紅桃)와 장미(薔薇) 두 가지를 중종의 어관(御冠)에다 꽂으면서 ‘전하의 양 쪽에 누른 빛과 분홍 빛이 어른거린다’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서 보듯이 장미는 임금과 관련된 귀한 꽃이었던 것이다.

또한 할미꽃을 들 수 있다. 할미꽃은 『삼국사기』 신문왕대의 기록에 이미 등장하고 있어, 우리에게 낯익은 토종꽃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설총은 신문왕에게 꽃을 의인화하여 왕의 도리를 충고했다. 여기서 목단은 어진 임금으로 표현하고, 장미는 간신으로, 할미꽃(백두옹)은 충신으로 표현하여 왕의 갈등과 깨우침을 그려놓았다.

다음으로 해당화가 있다. 조선시대에 해당화는 여인들의 옷 무늬로 많이 쓰였는데 화사한 색과 소담스러운 꽃송이는 젊음의 상징이어서 자수나 화조 병풍으로 그려졌다.

한편으로 해당화는 늙고 시듦을 비유하는 꽃으로 노래되기도 했다. 한국 민요에서 해당화가 제재로 사용된 작품은 총 40편으로 그 중에서 34편이나 되는 작품에 “명사십리 해당화야 네 꽃 진다 서러 마소”라는 관용구가 사용되었다.

관상과 관련된 꽃

백일홍은 그 이름과 같이 거의 백날을 두고 계속하여 피고 꽃이 붉기 때문에 백일홍(百日紅)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관상용으로 많이 심어졌다.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산실인 전남 담양의 소쇄원과 식영정· 명옥헌, 그리고 경주의 서출지 등과 같은 원림에서 백일홍을 볼 수 있다. 강희안은 15세기 중엽에 쓴 양화소록에서 비단 같은 꽃이 노을 빛에 곱게 물들어 정원 가에서 환하게 사람의 혼을 뺄 정도로 아름답게 피어 있으니 風格이 최고라고 하였다. 그는 한양의 公侯의 저택에서는 백일홍을 뜰에 많이 심어 높이가 한 길이 넘는 것도 있다고 기술하였다.

다음으로 벚꽃이 있다. 봄소식을 알려주는 화사한 벚꽃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사람들이 우리나라로 이주하여 벚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벚꽃놀이를 즐기게 되었다.

이와 함께 영산홍이 관상용으로 심어졌다. 영산홍은 일본철쭉화, 두견화(杜鵑花), 홍색두견화(紅色杜鵑花), 왜철쭉, 오월철쭉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조선시대에 관상용으로 영산홍을 좋아한 임금이 세종과 연산군이었다.

세종은 재위 23(1441)년에, 뜰에서 영산홍을 기르도록 명했다. 임금께서 즐겁게 감상하시고 상림원(上林園)에 하사하시어 나누어 심도록 명하셨다고 한다. 세종은 정무를 보는 틈틈이 영산홍을 감상하여 정서를 순화하고 어진 정치를 펼쳤다. 그런데 영산홍을 지나치게 좋아한 임금이 연산군이었다. 연산군 11년(1505) 1월 26일에 “영산홍 1만 그루를 후원(後苑)에 심으라” 명했다. 같은 해 4월 9일에 영산홍을 비롯해 치자 · 유자 · 석류 · 동백 · 장미 등 여러 화초들을 모두 흙으로 붙여서 바치게 하였다. 감사(監司)들이 견책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종류마다 혹은 수십주(株)를 바치되 계속 날라 옮기니 백성이 지쳐서 길에서 죽는 자가 있기까지 하였다. 꽃에 지나치게 빠져 백성들을 괴롭힌 연산군은 폭군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음으로 작약이 있다. 작약은 꽃이 아름다워 우리나라에서 예로부터 관상용으로 길러왔다. 특히 궁궐에서 꽃을 피워 공주와 왕의 사랑을 받아왔다.

고려 충렬왕 때에 제국대장공주는 수녕궁(壽寧宮)의 작약꽃이 만발하자, 꽃 한 가지를 꺾어 오래 동안 손에 잡고 감상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고려의 뒤를 이은 조선의 궁궐에도 작약이 심어졌다. 태종 12년 4월 12일에 상왕(上王: 정종)이 “명일에 광연루(廣延樓)에 가서 작약이 만개한 것을 보고 싶다”고 태종에게 전갈하게 한 기록이 나온다. 이와 같이 작약은 궁궐에서 기른 꽃이었다.

실용과 관련된 꽃

실용과 관련된 꽃으로 목화꽃을 들 수 있다. 목화를 원료로 한 무명을 입은 우리 민족은 백의민족으로 불려왔다. 목화를 우리나라에 들어온 사람은 문익점(文益漸)이었다. 문익점은 고려 공민왕 12년(1363년)에 원나라에서 돌아올 때 목화씨를 따서 붓대롱 속에 10알을 숨겨 국경에서의 검사를 통과하여 숨겨 들여왔다.

목화가 들어오면서 의복 재료에 혁명이 일어나 고려말기의 시험단계를 거쳐 조선조를 들어와 재배가 권장되었다. 조선시대에 삼베 대신 무명이 통화의 단위가 되었다. 세종대부터는 무명이 국폐(國弊: 법적으로 통용되던 화폐)로 인정되었던 것이다. 한편 무명은 공부(貢賦: 조세)로서 국가가 징수하였다.

다음으로 벚꽃이 있다. 벗나무의 껍질은 화피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활을 만드는데 꼭 필요한 군수문자였다. 화피(벚나무 껍질)는 평안도 강계도호부(平安道 江界都護府)와 함길도(咸吉道) 등에서는 공물(공물)로 국가에 바쳤음이 세종실록 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다.

한편 벚나무는 목판인쇄의 재료로 쓰였다. 고려시대에 몽골군의 침입을 부처님의 힘으로 막기 위해 만들었던 팔만대장경의 판은 60%이상이 산벗나무로 만들어졌음이 전자현미경을 이용한 조사에서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