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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

보상의 단위

호조가 연분 사목(年分事目)을 가지고 아뢰었는데, 판하하기를,
“백성들이 일년 내내 힘써 일하고서야 입에 넣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밭종자이다. 그런데 저렇게 피해를 입었으니 고통이 내게 있는 것만 같다. 수재를 입은 밭에 대하여 목화밭의 예에 따라 급재(給災)하라.”
하였다.

정조 15년의 기사는 수재를 입었을 때 국가가 보상해 주는 기준이 목화밭의 예에 따랐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참고문헌

「정조조」, 『국조보감』 제73권 5 15년(신해, 1791)

애민

밤이 되자 마부가 불을 쪼이고
주인옹도 가까이 다가앉아서
밤 깊도록 이야기 그치지 않고
질문이며 대답이 이어지누나
주인옹 하는 말 “오랜 내 생애에
금년처럼 굶주린 해가 없는데
죽을 고비 백번 넘겨 겨우 산 것은
고을의 어진 사또 선정(善政) 덕이니
배고픔 참아가며 백성 구제해
한 사람도 죽어나간 사람 없었소
올 가을 곡식 비록 영글었지만
관아와 민간에 저축이 없어
이번 겨울 죽음은 면한다 해도
내년 연명 어이할까 근심이라오
더구나 목화가 흉작이어서
무엇보다 홑옷 입을 근심 앞서오
서리가 머지않아 내릴 양인지
지난밤 내린 이슬 써늘하였소”
곁에서 듣느라 잠 못 이루고
고요히 민생고를 염려하였네
민요 실로 채집할 가치 있지만
무슨 수로 수령에게 전해질는지
僕夫夜附火
主翁來近邊
更闌語不休
問答頗連綿
自言閱歲多
饑荒無今年
百死得一生
正賴明府賢
忍飢哺赤子
無一溝中捐
所憂秋雖熟
官私無宿儲
緩死且今冬
開歲將何如
木綿況空田
最悶衣裳單
霜降應不遠
白露前夜寒
側聽爲不寐
靜念民生艱
風謠誠可采
何由達縣官

목화는 민생을 상징하는 꽃이다. 목화가 의복을 만드는 원료이므로 백성들의 삶과 가장 밀접한 식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화의 일년 풍흉(豊凶)에 따라 백성들의 삶은 크나큰 영향을 받았다.
김창협의 한시는 주인과 마부의 대화를 듣고 기록한 서사적 작품이다. 마부는 어진 사또 덕에 굶주림은 견딜 수 있겠지만 목화의 흉작으로 홑옷 입을 걱정이 크다고 했다. 이런 사정을 글로 옮겨 정치에 활용하려는 작자의 의도에서 애민의식이 잘 나타난다.

참고문헌

김창협, 「밤에 누워 주인옹과 마부가 주고받는 말을 듣고 기록하다[夜臥 聞主翁與僕夫語記之]」, 『농암집』 제4권 시(詩)

약재

송이석(宋履錫)의 문집인 남촌문집(南村文集) 잡저에는 「면종신방(綿種新方)」이란 글이 있는데, 이는 효험이 기이한 민간요법을 소개한 것이다. 대표적인 처방으로 그는 목화씨 한 움큼을 볶아 술 한 주발에 타서 달인 다음 이를 복용하면 감기는 물론 웬만한 열병에도 직효가 있음을 소개하고 있다.
목화의 씨는 민간에서 다양한 약재로 사용되었다. 「면종신방」은 기축년에 안동 하회마을 유성룡(柳成龍) 구택에 불이 났을 때 발견된 것이다. 이무렵 안동 인근에 역병이 크게 번졌는데 이 방법을 써서 큰 덕을 보았다는 사실까지 자세하게 적어놓은 것이다.

참고문헌

송이석, 「면종신방」, 『남촌문집(南村文集)』

왕비의 간택

영조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를 간택할 때의 이야기이다. 임금님이 간택을 보는데, 다른 소녀들은 방석을 모두 깔고 앉았지만 김한구의 딸은 방석을 깔고 앉지 않고 서 있었다. 영조대왕이 그 까닭을 물으니 방석에 저의 부친의 성명이 쓰여 있기 때문에 앉을 수 없다고 했다. 영조가 다시 이 건물의 서까래가 몇 개인지를 물으니 다른 소녀들은 직접 세어보려고 떠들썩했지만 그 소녀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낙수물 떨어진 걸 보고 서까래의 숫자를 맞추었다. 임금이 다시 꽃 중에서 무슨 꽃이 제일 좋은가 하고 물으니, 소녀는 목화꽃이 가장 좋다고 했다. 그 까달은 목화꽃이 만백성이 옷을 해 입을 뿐만 아니라, 꽃이 두 번 피기 때문인데, 한번은 목화꽃이 피고 나중에는 목화꽃이 하얗게 되어 박과 같이 피기 때문이라고 했다. 소녀는 계속되는 질문에 고개 중에는 보리고개가 제일 높고, 새중에는 먹새가 제일 크다는 대답을 하여 왕비로 간택되었다. 그래서 영종대왕은 예순네살에 김한구의 딸에게 장가를 다시 들게 되었다.
목화는 지혜로운 왕비를 간택하는 설화의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예시 작품은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의 이야기로 되어 있으나 설화 각편에 따라서는 주인공이 명성왕후 민씨로 바뀌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 목화가 만백성의 의복 재료이며 두 번의 꽃을 피운다고 한 것은 꽃이 지닌 실용성을 중시한 것이다. 목화가 백성들의 실용과 직결된다는 생각은 백성들의 고충을 알아야 하는 국모로서 필요한 덕목이다.

참고문헌

안평국 구연, 「이자겸 이야기」, 『한국구비문학대계』 1집 2책 (여주읍 편)

조세의 단위

무명이 신역(身役) 대신에 쓰인 예는 중종 38년(1543) 7월 21일 호조에서 다음과 같이 아뢴 말에서 알 수 있다. “평안도의 노비가 신공(身貢: 관노비 등이 신역의 대가로 내는 공물)으로 내는 면주(綿紬: 무명)는 나라에서 쓰는 것에 여유가 있으므로 지난해에 바친 면주를 쌀로 바꾸어 창고에 들였습니다.”
戶曹啓曰 “且平安道奴婢身貢綿紬, 以國用有裕, 故前年貢紬, 作米納倉
한편 조선시대에 무명은 공부(貢賦: 조세)로서 국가가 징수하였다. 중종 이후에는 보포(保布), 신포(身布), 군포(軍布)라 하여 신역(身役)대신에 무명으로 납입하는 법이 생겼던 것이다. 한편 무명은 무역품으로 일본으로 수출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중종 38년 」, 『조선왕조실록, 』

향수

쓸쓸히 떠돌다 그냥 보낸 좋은 세월
가을날 호서(湖西) 땅 들어서니 집 생각이 더욱 나네
해질녘 시골길 혼자서 걷노라니
돌밭에 질펀한 목화꽃 송이송이
客游牢落送年華
秋入湖山倍憶家
斜日獨尋村逕去
石田開遍木綿花
장유의 작품에서 목화는 고향 생각을 떠오르게 하는 소재로 쓰였다. 가을날의 들길 옆 돌밭에 피어있는 목화는 한가하고 여유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이를 통해서 민생의 안락함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장유, 「가을날 들길을 가며[秋日野行]]」, 『계곡선생집』 제33권 칠언 절구(七言絶句) 2백 91수(首)

화폐의 단위

세종 즉위년(1418) 9월 26일에 사헌부에서 계하기를, “주 ․ 군에서 수납하여 바치는 표피(豹皮)를 제용감((濟用監)이 수납할 때에 조그만 구멍이 뚫려도 곧 모두 물리칩니다. 이런 까닭으로 한 장의 값이 거의 거의 무명 40필에 이르게 됩니다.”
司憲府啓曰: “州郡所納進獻豹皮, 濟用監於收納之際, 小有孔穴, 輒皆不納。 緣此一領所直, 幾至?布四十匹
목화를 원료로 한 무명을 입은 우리 민족은 백의민족으로 불렸다. 목화가 들어오기 전까지 상류층은 명주나 모피를 입었고, 서민들은 삼베가 옷이었다. 그러나 무명을 입으면서 온 백성들이 혜택을 입게 되었다. 무명 옷감은 튼튼하고 땀을 잘 흡수하기 때문이다.
목화는 세계에 약 40여종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재배된 것은 아세아면이었다. 목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고려 공민왕 12년(1363년) 문익점(文益漸)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목화를 원료로 한 무명은 그 전에 이미 우리나라에 소개되어 있었다. 이 점은 고려 충렬왕 22년(1296년)에 원나라 성종이 왕의 노복에게 목면 411필을 하사하였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목화가 들어오면서 의복 재료에 혁명이 일어나 고려말기의 시험단계를 거쳐 조선조를 들어와 재배가 권장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삼베 대신 무명이 통화의 단위가 되었다. 무명을 기준으로 상품의 값어치를 평가한 예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세종대부터는 무명이 법적으로 통용되던 화폐인 국폐(國弊)로 인정되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세종 즉위년」, 『조선왕조실록』

효성

뽕따라가
누에쳐서
새실중실
뽑아낼제
새실을랑
갈아내어
부모의복
장만하고
뒷터에는
목화심어
송이송이
따낼적에
좋은송이
따로모아
부모옷에
많이두고
서리맞은
마꽃따서
우리입새
많이두세

목화는 노동요의 소재로도 많이 등장한다. 누에를 쳐서 명주를 자아내고 목화를 따서 목면을 생산하는 일은 모두 여성들의 몫이었다. 이때 여성들은 노래를 부르며 일의 고됨을 다소나마 해소할 수 있었다.
「목화노래」는 좋은 명주새실과 목화송이로 부모 의복을 만들고 자신들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는 여성들의 착한 효성을 노래한 작품이다. 부모를 먼저 배려하는 마음에는 따뜻한 느낌의 목화가 지닌 감촉이 그대로 느껴진다.

참고문헌

김인분 구연, 「목화노래」, 『한국구비문학대계』 7집 16책

생태

아욱과에 속하는 일년생 초본식물이다. 원산지인 열대지방에서는 다년생 목본식물이다. 높이도 우리나라에서는 90㎝ 내외이지만 열대지방에서는 180∼210㎝까지도 자란다. 원줄기는 곧게 뻗으며 15개 내외의 마디가 있고 각 마디에는 잎과 두 개의 곁눈이 있다. 꽃은 7월 하순에서 8월 하순에 걸쳐 피며, 꽃봉오리가 맺히고 난 뒤 약 30일이 지나 꽃이 핀다. 꽃에는 5매의 꽃잎과 3매의 꽃받침, 1개의 암술 및 약 130개의 수술이 있다. 열매를 다래라고 하는데 녹색 또는 진한 녹색을 띠며 모양은 둥글거나 달걀모양인데 표면에는 홈 모양의 무늬가 있다.

목화는 의복을 만드는 주원료로서 백성들의 삶과 밀접한 꽃이다. 통화의 단위로 쓰였을 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는 약재로도 이용되었다. 백성들의 삶 자체를 상징하는 동시에 따뜻한 촉감은 효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길흉점치기

정월 대보름날 아침, 소에게 밥과 나물을 함께 차려 주어 소가 먹는 것을 보고 그해 농사의 풍년을 점치는 풍속이다. 전남에서는 여러 가지 음식을 갖추어 놓고 소가 어느 것을 먼저 먹느냐를 보는데, 이때 가장 먼저 먹는 것이 그해 풍년 든다고 여긴다. 고사리, 무나물을 비롯하여 밥과 함께 목화씨를 놓아 소가 먹도록 하는데, 목화씨를 먼저 먹으면 목화가 풍년이 들고, 밥이나 곡식을 먼저 먹으면 나락 풍년이 든다고 믿는다. 반면에 강원도에서는 밥보다 나물을 먼저 먹으면 논농사가 평년작이 될 조짐으로 여기기도 한다.

지역별로 소가 무엇을 먼저 먹느냐에 따라 농사점의 결과를 달리 판단한 것은 지역적 특성에 따른 것이다. 곧 강원도는 산간지역이라 나물의 풍성함이 중요할 것이고, 전남지역은 벼농사지역이라 밥과 곡식을 먼저 먹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참고문헌

장장식, 「소밥주기」, 『한국세시풍속사전』

목화주

약술을 만들 때는 목화꽃의 꽃송이를 따거나 어린 열매로 담근다. 목화주의 재료는 목화열매 또는 꽃 600g, 소주 1.8ℓ이다. 꽃이 지고 2주 정도 지나면 목화열매가 맺히고 열매를 깨뜨려 보면 하얀 속살이 아주 맛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완숙되는데 솜이 되기 전 열매를 따다가 술을 담는다. 꽃으로 담글 때는 재료 2~3배의 독한 술을 붓고 열매로 담글 때는 3~4배 정도의 술을 붓는다. 이때 술은 독하고 맑은 술을 사용하면 좋다. 담근 술을 밀봉하여 냉암소에 3~4개월 보관한 후 음용한다.
목화주는 부인들의 혈액순환을 도와주며 젖이 부족한 산모가 먹으면 젖이 많아지고 신경통이 있는 사람에게 좋은 술이다. 그러나 여성이 배란기 때 취하도록 마시면 임신이 되지 않는다고 했으며, 남성이 먹게 되면 원기가 솟아나고 양기가 강해져 배고픈 줄 모른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한국문화상징사전』 2, 동아출판사, 1995

볏가리대 세우기

볏가릿대를 낟가릿대 또는 화간(禾竿)이라고도 부른다. 농가에서는 정월 열사흗날 마당에 소나무를 세워 그 위에 짚을 묶어 쌓아서 기장(旗杖)을 만들고, 벼·조·기장 등의 이삭을 꽂아놓고 목화를 매달기도 한다. 낟가릿대는 2월 초하룻날에 거두는데 헐기에 앞서 "벼가 몇 천 석이요, 조가 몇 백 석이요, 콩이 몇 백 석이요" 하고 외친다. 마치 큰 부잣집에서 풍년이 들어 수확이 많은 것처럼 모의동작을 하면 풍년이 들어 부자가 된다는 것이다.
낟가릿대를 세우는 날에는 키가 왜소한 사람은 남의 집에 드나들지 않는데, 그것은 한 해 곡식 성장이 나쁘고 수확이 적어진다는 속신 탓이다. 아이들은 새벽에 일어나서 나무 주위를 빙빙 돌면서 노래를 부르며 풍년을 빈다. 산골에서는 가지가 많은 나무를 외양간 뒤에 세우고 곡식의 이삭이나 목화꽃을 걸어둔다. 궁중에서도 대궐 안에서 곡식을 갈고 거두는 형상을 본떠 좌우로 나누어 승부를 겨루는 풍습이 있었다. 보름날에 세운 볏가리는 머슴날인 2월 초하룻날에 쓰러뜨리며 볏가리의 곡식을 내어 떡을 찌고 머슴에게 술과 음식을 먹이며 하루를 즐겁게 논다. 충남 서산, 당진 지역의 경우에는 소나무나 대나무를 베어다가 맨 꼭대기에 오곡(五穀)을 헝겊에 싸서 매달고 짚으로 주저리를 틀듯이 장대를 감싼 다음, 벼이삭이 늘어진 모양으로 동아줄 3개를 거꾸로 틀어 줄을 매어 세운다. 충남 서산시 인지면 차리의 경우, 1996년경만 하더라도 마을에서 볏가릿대를 4곳에 세웠다.
살맹이나무 가지에 면화송이를 풍성하게 매달고, 여인상 인형을 몇 개 매달아 마치 여인들이 풍성한 목화밭에서 목화를 수확하는 듯한 모습을 연출하는 것이다.
볏가리를 거둠은 본격적으로 한 해 농사가 시작됨을 의미한다. 볏가리 세우기는 풍농을 기원하는 농민들의 염원이 잘 반영되어 있다.

참고문헌

이관호, 「볏가릿대세우기」, 『한국세시풍속사전』

삼묘일 보기

음력 2월에 묘일(卯日)이 세 번 들면 목화 농사가 잘 된다고 믿는 전라도와 경남 지방의 풍속이다. 면화(棉花)를 하는 농가(農家)에서는 2월에 묘일이 몇 번 드는가를 본다. 전남 신안군 임자면의 면화 농가에서는 음력 2월 한 달 동안에 묘일이 세 번 들면, 그 해 목화 농사가 잘 된다고 여겼다. 따라서 묘일이 세 번 드는 해에는 목화 농사에 더 힘썼다고 한다. 진도에서는 십이지의 짐승 중 털이 있는 짐승의 날이 먼저 들면 면화가 잘 되고, 털이 없는 짐승의 날이 먼저 들면 면화가 피지 않는다고 여겼다. 경남에서는 토끼는 털이 많아 토끼날이 정초의 앞에 들면 그 해 목화 농사가 잘 된다고 여기는 풍속이 있다.
토끼는 털이 있는 동물 중에서도 목화의 색깔처럼 흰 털을 가진 동물이다. 여기에서 토끼와 목화 농사와의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다. 토끼와 관련된 풍속은 보통 정초에 행해지기도 하고 음력 2월에 행해지기도 한다.

참고문헌

이옥희, 「삼묘일보기」, 『한국세시풍속사전』

예언

털 많은 토끼날이 정초에 들면 그해에는 목화가 풍년이 든다고 한다. 특히 설날이 유모일(有毛日)이면 그해는 오곡이 잘되고 풍년이며, 무모일(無毛日)이면 반대로 흉년이 들 것으로 판단한다. 또한 정초 10일 이내에 유모일이 많이 들면 풍년이고 무모일이 많으면 흉년이 들 것으로 판단하는 경우도 있다. 경남지방에서는 정초에 유모일이 많으면 목화 농사가 잘되고 네발짐승의 가축도 번성하는데, 무모일이 많으면 반대로 목화 농사나 네발짐승의 가축이 잘 안 된다는 것으로 여긴다.
십이지는 털 있는 유모일, 털 없는 무모일로 나누어 새해의 풍흉, 점복, 상점 문 여는 날 등을 따졌는데, 유모일은 길한 날이고, 무모일은 흉한 날로 쳤다. 토끼가 다산(多産)하는 동물인데다 토끼의 털이 목화처럼 하얗기 때문에 그런 사고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천진기, 「정초십이지일」, 『한국세시풍속사전』

입하 풍속

겨울에 눈이 많이 오는 해는 목화가 풍년 든다는 뜻으로 “입하 일진이 털 있는 짐승날이면 그 해 목화가 풍년 든다.”는 말도 있다.
목화가 의복과 침구에 중요하기 때문인데, 눈이 많이 오면 그 해에 목화도 함께 풍년이 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을 것이다.

참고문헌

이상희,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1

풍년놀이

평안남도 성천, 순천, 강동에서는 음력 이월 초하룻날, 뒤뜰에 면화(棉花)가 만발한 모양의 나뭇가지를 세워논다. 살맹이나무(멧대추나무) 가지에 목화송이를 많이 꽂아놓고, 여인상(女人像)의 인형을 몇 개 만들어 달아둔다.

살맹이나무 가지에 면화송이를 풍성하게 매달고, 여인상 인형을 몇 개 매달아 마치 여인들이 풍성한 목화밭에서 목화를 수확하는 듯한 모습을 연출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이옥희, 「목화풍년놀이」, 『한국세시풍속사전』

꽃 생태정보

식물명 : 목화
과명 : 무궁화과
학명 : Gossypium indicum
종류 : 초본(풀)
이명 : 면화, 면, 면근피
꽃색 : 흰색, 연한 황백색
계절 : 가을
분포 지리 : 멕시코, 페루 원산(귀화식물), 전국
분포 지형 : 농가 재배
생육상 : 1년생초본(한해살이풀)
높이 : 60~150cm
개화기 : 8월 ~ 9월
결실기 : 10월
열매의 형태 : 삭과(튀는열매) 익으면 과피가 말라 쪼개지면서 씨를 퍼뜨리는 여러 개의 씨방으로 된 열매
용도 : 공업용(씨껍질털, 섬유자원), 기름(씨), 약용(뿌리껍질, 씨)
기타 :
사진제공자 : 김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