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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년(인조 15년) 호남 어사 성이성 호남암행록(湖南暗行錄)

출처 : 호남암행록(개인 문집)



성이성이 1637년(인조 15년)에 호남 암행어사를 제수받아 호남 각지를 다니며 감찰한 뒤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일지 형식으로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 인조 15년과 17년, 두 경우 모두 7월에 성이성이 암행어사로 파견된 적이 있다. 본문의 기록만으로는 어느 해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다만 전쟁 직후의 상황과 관련된 기록이 다수 보이는 것으로 봐서 병자호란이 일어난 다음해인 인조 15년, 즉 1637년이 좀더 유력하다.








7월 18일 : 직산(稷山)에서 진천(鎭川)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소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노인 부부가 지나가다 잠시 앉았다. 어디 사는지를 물었더니 진천 사람이었다. 진천 사또가 현명한 사람인지를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난리 전에는 잘 분별하여 다스렸는데 난리 후에는 난리통에 없어져버린 창고의 곡식과 관청의 물품을 찾아내는 데 급급합니다. 모두 읍 주변의 사람들이 훔쳐가서 산 근처에 있는 집에 감추어두고 있다고 말하면서 읍내 사람들과 산기슭에 사는 사람들 모두를 장부에 올리고 재물을 바치고 죄를 용서받도록 하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무고한데도 누명을 쓴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이번 지방 수령 평가에서 다시 우수한 평점을 받았습니다. 감사가 하는 일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습니다.” 저녁에 현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촌사(村舍)에서 묵었다. 주인에게 물었더니 마찬가지로 대답했다. 캄캄할 때 집에 온 사람이 있었고 주인은 그에게 아무 일 없었는지를 물었다. 내가 “지금은 숯을 걷어들이는 때가 아닌데.”라고 하자 주인이 말했다. “우리 현에서는 매년 봄과 가을에 숯을 징수하지만 난리가 끝난 뒤에 걷어들였던 것은 관가에서 말편자를 제조하는 데 이미 다 써버렸고 지금 다시 가을 나무[秋木]를 바치라고 독촉하고 있습니다.” 내가 “말편자를 어디에 사용하는가?”라고 묻자 “사용처를 백성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19일 : 속남역(粟南驛)에서 말을 교체하였다. 청주 읍내를 가로질러 지나갔다. 비를 무릅쓰고 청주 땅에 들어가서 묵었다.
20일 : 문의(文義)와 회인(懷仁)의 경계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정오에 회인현 아래에서 말의 먹이를 주었다. 한 늙은 군사가 꽤 많은 일을 알고 있는 것 같아 관가의 일에 대해서 물었더니 “관가의 창고는 전라 감사의 군대에 의해 모두 탕진되었고 태수는 단지 아직 걷어들이지 못한 세금을 징수하여 겨우 끼니를 잇고 있을 뿐입니다. 달리 백성들을 수탈하는 일은 없습니다. 다만 소 전염병이 거세게 나돌아 10마리에 1마리도 살아남지 못하고 있습니다. 간혹 살아남은 소가 있었지만 언제 병에 걸릴지 모르기 때문에 미리 도살하고 있습니다. 태수는 도살을 금지시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한 술 더 떠 구입하여 관가에서 사용하기도 합니다.”라고 말했다. 저녁에 현의 경계 지역인 대나무골(竹谷)에서 묵었다.
21일 : 현의 경계 지역인 용두(龍頭)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대답하는 내용들이 모두 어제 늙은 군사가 한 말과 같았다. 저녁에 회인(懷仁)ㆍ문의(文義)ㆍ회덕(懷德)의 경계 지역에서 묵었다. 세 곳은 형제의 고을로 정치 역시 서로 비슷했지만 문의가 가장 나은 편이라고 말들 한다.
22일 : 문의현 아래에서 묵었다.
23일 : 청주(淸州) 땅 오천(烏川)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저녁에 공주 금강(錦江) 변의 마을에서 묵었다. 공주 목사는 분명하게 정치를 시행하여 민심을 꽤 얻고 있었다.
24일 : 공주(公州)를 지나갔다. 부여(扶餘)와 석성(石城)의 경계 지역에서 묵었다. 사인(士人) 이경탁(李景鐸)이 나와서 만났다. 석성과 부여의 수령은 모두 칭송을 받고 있었지만 이산(尼山)의 수령은 제언(堤堰) 때문에 매우 불평을 듣고 있었다. 다만 석성 수령은 늙은 아비를 관아에 모시고 있다가 최근에야 거처를 옮겼다.



25일 : 석성현 5리 밖 봉두촌(鳳頭村)에서 아침을 먹었다. 사인(士人) 윤기(尹沂)가 나와서 만났다. 정오에 현 내부를 지나가는데 곳곳에서 멀리서 우리를 살피면서 서로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나에게 우리의 정체가 발각되었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개인적인 용무로 사또를 만나려고 하는 사람인 것처럼 하고 들어가려 하였다. 그러나 한 사령(使令)이 말을 끌어안으며 죽어도 들여보낼 수 없다고 하면서 막았다. 내가 언제부터 손님을 들어오지 못하게 막느냐고 물었더니 최근에 비롯되었다고 대답했다. 대개 전령(專令)이 암행하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모두 자기 자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자기 자신에게 잘못된 것이 없다면 태연하게 처신하는 것이 당연하다. 어사가 다니는 것에 대해 그저 왔다가 가도록 내버려두면 그만이지 그의 행적을 정탐하고 출입을 막아서 현의 정치 상황을 살펴보지 못하게 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문서를 보고 문책할 필요도 없이 그의 관직 생활은 이런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오후에 부여의 역참에서 말을 교체하였다. 저녁에 백마강(白馬江) 가에 있는 직부(直夫) 이협(李挾)의 집에서 묵었다.
26일 : 부여 땅에서 아침을 먹었다. 주인이 사또를 칭찬하였는데 이경탁이 한 말과 같았다. 저녁에 홍주(洪州)의 경계에서 묵었다.
27일 : 홍주 땅에서 아침을 먹었다. 저녁에 홍주 읍내에서 묵었다. 지나는 곳마다 모두 그 사또를 칭송하였다. 홍주는 40개 면으로 구성되어 있고 전쟁의 피해를 입은 곳이 17개 면이다. 적들이 홍주에 들어왔다 회군하였지만 관고(官庫)와 외창(外倉)은 온전할 수 있었다. 목사가 20일을 달려와 나누어서 지켰다. 관에서 저장하고 있던 곡식을 하나도 잃지 않았다.
28일 : 홍주에서 아침밥을 먹었고 저녁에 홍주 땅의 인후원(仁厚院)에서 묵었다.
29일 : 예산 땅에서 아침밥을 먹었고 정오에 예산 땅에서 쉬었다. 길에서 양반을 만나 말에서 내려 이야기를 나누었다. 또 타작하는 양반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현감은 조심스럽게 관직 생활을 했고 정치를 번잡하게 시행하지 않았다. 아래 위 사람들이 서로의 직분을 잃고 다만 기쁘게 하려는 데에만 열중하여 백성들을 위협하는 정치를 시행했다는 결점이 있었다. 신창현을 지나갔다. 온양 땅에서 묵었다. 온양수령은 새로 부임하였지만 백성들의 칭송이 자못 많았다.
8월 1일 : 하루 내내 큰비가 왔다. 진천(鎭川)과 접경을 이루는 목천(木川) 땅의 대원(大院)에서 묵었다. 원의 주인 부자(父子)는 많은 일을 알고 있었다. 목천 수령이 결단력 있고 분명하다고 매우 칭찬하였다. 촌민들은 죄인으로 잡혀 들어가거나 관원들이 독촉하러 나오는 일을 당하지 않았다. 난리 때에 관청의 창고가 텅 비게 된 것은 진천과 목천이 마찬가지였지만 진천 사또는 채워넣는 데 급급해서 모두 현의 백성들이 훔쳐갔다고 하면서 진짜와 가짜를 가리지 않고 형벌을 적용하여 승복을 받고 나서 가을이 되면 대가를 납입하도록 하면서 1석에 10두를 추가로 납부하도록 정해 주었다. 그러나 목천 사또는 공론을 받아들여 낼 수 있는 사람은 내고 낼 수 없는 사람은 내지 않게 하였기 때문에 관의 입장에서는 걷어들이는 것이 있으면서도 억울하게 누명을 쓰는 백성들은 없게 하였다.


2일 : 진천(鎭川) 땅의 산곡(山谷)에서 아침을 먹었다. 저녁에 읍내의 상촌(上村)에 있는 하응시(河應時)의 집에서 묵었다. 관아의 일에 대해 들었더니 하는 말이 많았지만 매우 조리가 없었다.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난리가 끝난 뒤에 현의 관리가 먼저 들어가 관아의 창고가 텅 빈 것을 보자 관아에 소속된 사람들과 근처의 백성들이 모두 훔쳐간 것이라고 말하고는 백성들 집에 묻어 놓은 곡식들을 모두 찾아내서 몰수하였다. 또 먼저 관아에 소속된 사람들을 심문하고 또 접주(接主)들의 거주지를 탐문하여 주인과 손님 모두에게 재물을 바치고 죄를 용서받도록 하였다. 아전들과 백성들은 형장(刑杖)을 이기지 못하여 진짜 물건을 훔쳐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모두가 죄를 인정하였다. 승복을 받아내고는 강제로 납부할 수량을 정해 주었다. 함께 싣고 오기도 하고 소나 말이 끄는 수레에 싣고 오기도 했다. 또 진휼을 위한 곡식을 명목상으로는 나누어주었다고 했지만 자못 청렴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3일 : 길가 한 양반이 시냇가에 말을 풀어놓고 있었는데 벼슬아치였던 노인인 듯했다. 그가 하는 말 또한 이전 사람들의 말과 비슷했다. 또 관가에서 여름 동안 소를 매입하여 도살하여 이윤을 챙겼고 매일 80근의 고기를 관용으로 사용하였고 소를 이산(尼山) 농막으로 많이 보냈다고 말했다. 성암동(聖巖洞) 촌사람의 말은 양반의 말과 합치하였다. 한두 사람의 말이라면 다 믿기 어렵지만 여러 사람들의 말이 모두 동일하자 마음에 의심이 생겼다. 냇가의 노인이 말했다. “암행어사가 이미 내려왔지만 태수는 모든 문서와 공수청(公需廳 : 지방 관아의 경비를 관리하던 곳)의 기물을 모두 은닉시켰다.” 오후에 서리에게 누추한 의관을 입혀서 앞서 보냈고 나도 무관들의 복장인 전립(戰笠)과 전복(戰服)을 입고 걸어서 들어가 몰래 살폈다. 현감은 동헌에 앉아 있었는데 책상 아래에는 필기구만 있었고 관청에는 있어야 할 곳에 아무것도 없었다. 아전들의 근무처[作廳]에는 빈 서류함 하나만 달랑 있을 뿐이었다. 역졸들이 관아의 물품 관리소로 가보니 솥 하나만 있었고 조용하여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노인 양반의 말이 헛된 말이 아니었다. 아전들이 의아한 기색을 보이자 바로 산 뒤쪽으로 걸어서 나왔다.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장인역(章人驛)에 들어가서 묵었다.
4일 : 말을 교체하고 청안(淸安)으로 가는 길로 향했다가 진천으로 돌아가는 아랫길로 들어서 깊은 계곡을 넘었다. 산촌에서 말에게 먹이를 주었다. 대장장이의 집이었다. 그가 말했다. “올 여름에 세 번에 걸쳐 현에 들어가 말편자를 만들었습니다.” 저녁에 산곡(山谷)에서 묵었다.
5일 : 비가 왔다. 느지막이 길을 나서 목천으로 향했다. 두 명의 상놈이 앞쪽에서 말을 끌고 있었다. 같이 가며 물었더니 진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진천 수령에 대한 사항은 이전에 들었던 말과 거의 비슷했다. 천안(天安) 땅 신대춘(申大春)의 집에서 묵었는데 객관의 아전인 석보(碩輔)의 아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