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1647년(인조 25년) 호남어사 성이성의 호남암행록(湖南暗行錄) 1647년(인조 25년)의 일기

출처 : 호남암행록(개인 문집) 1647년(인조 25년)의 일기


성이성이 1647년(인조 25년)에 다시 호남 암행어사를 제수받아 호남 각지를 다니며 감찰한 뒤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일지 형식으로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1647년(인조 25년) 11월 5일 : 행장(行裝)을 차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심택(沈澤)ㆍ조윤(趙贇)ㆍ민광훈(閔光勳)ㆍ유경창(柳慶昌)ㆍ이행원(李行源)ㆍ이0영(李0英)ㆍ김중일(金重鎰)ㆍ이해창(李海昌) 그리고 나 성이성(成以性, 1595~1664)이었지만 조윤, 00, 000 김중일 등 4인은 외부에 있었다. 승정원(政院)에서 000 답하였다 : “00 올라와서 말하라.” 7일에 00문안을 드린 후 00(곳곳에 글자가 빠져 있음 0는 글자가 빠진 곳-역자 주).
11월 8일 : 아침에 마패(馬牌)를 받아들고 승정원[政院]으로 가보니 이해창(李海昌) 등 2명뿐이었다. 봉서(封書)를 받고 남문을 통해 도성을 나와서 관왕묘(關王廟 : 관우를 모신 사당)에서 봉서(封書)를 뜯어보았다. 나는 호남 지역을, 이해창은 영남 지역을 지정받았다. 오시(午時 : 11시에서 1시 사이)에 한강을 건너 신원(新院)에서 말에게 먹이를 먹였다. 오후 9시경에 함께 용인(龍仁) 땅에 도착했다. 이해창은 재사(齋寺)에서 묵었는데 이해창의 사촌 이해안(李海安)이 000 소식을 듣고 음식과 술을 내왔다.
9일 : 날이 밝자 이해창과 길이 갈라졌다. 00에서 아침을 먹고 갈원(葛院)에서 말에게 먹이를 먹였다. 성환 찰방(成歡察訪) 장하연(張河衍)과 이야기하였다. 찰방이 00를 선물하였다.
10일 : 새벽에 찰방이 보러 와 죽을 차려주었고 말을 교체하였다. 솔마두(率馬頭)는 선립(先立)이고 대마부(大馬夫)는 득일(得一), 복마부(卜馬夫)는 말산(唜山), 중마부(中馬夫)는 용남(龍男)이었다. 천안(天安) 아래 5리쯤에 있는 주막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정오에는 덕경(德坰) 아래의 주막에서 휴식하였고 저녁에 궁원(弓院)에서 묵었다. 이날 100리를 갔다.
11일 : 새벽에 싸락눈이 내렸다. 눈을 무릅쓰고 길을 나섰다. 공주(公州) 5리 밖의 주막에서 아침을 먹었다. 밥을 먹고 길을 나섰다. 눈보라가 오락가락하였다. 정오에 이산(尼山) 위에 있는 주막 옆에 있는 촌집에서 쉬었다. 마침 전주 부윤(全州府尹) 박황(朴潢, 字는 德雨)이 새로 관직을 맡아 부임하는 길에 먼저 주막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저녁에 평천역(平川驛)으로 들어갔다. 이산(尼山)ㆍ은진(恩津)ㆍ연산(連山) 세 현은 역적의 출신지로 작년에 혁파되어 은산현(恩山縣)으로 통합된 곳이다. 고을의 읍(邑 : 고을 수령이 있는 중심지)은 평산역에 만들어졌다. 객사(客舍)는 역사를 그대로 사용하였고, 관아는 초가를 새로 지었지만 급하게 지어서 규모를 다 갖추지 못했다. 현감 민진관(閔震寬)은 차원(差員)으로 한양에 가 있다고 한다. 이날 100리를 갔다.
12일 : 새벽에 말을 교체하였다. 솔마두는 소대(少帶), 대마부는 대북(大北), 복마부는 융생(戎生), 중마부는 00이었다. 길을 나섰다가 전라 부윤이 여산군(礪山郡)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름길을 따라 군(郡) 뒤쪽의 역(驛)전 앞길로 갔다. 큰길가에 있는 송(宋) 감사의 농막에서 아침을 먹었다. 서리(書吏) 이준(李俊)에게 앞서 가서 읍내에서 아침을 먹도록 지시하였다. 정오에 삼례(參禮)를 지나갔다. 전주 부윤이 관사에 먼저 도착했는데 마중 나온 전주 사람들의 위세와 형세가 매우 성대했다. 저녁에 삼례 밖 25리 되는 곳에서 유숙하였다. 이날 100리를 갔다.


13일 : 금구현(金溝縣)을 지나갔다. 현감은 이침(李?)이다. 10리 밖 촌집에서 아침을 먹었다. 집집마다 모두 양반을 자처하면서 대접하거나 들어오게 하지 않았다. 아주 조그마한 집에 들어갔더니 열한두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자신은 임강진(任康津 : 강진은 호인 듯한데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역자 주)의 손주라고 하면서 이 촌락은 강진과 그 자녀들이 사는 곳이고 강진은 이미 죽었다고 말했다. 밥을 먹은 후 길을 나섰는데 10여 바리를 싣고 가는 한 무리의 젊은 아낙과 늙은 아낙들이 있었다. 그 속에는 스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한 여인이 있었다. 복장이 단정하였고 몸놀림 또한 가벼웠다. 그런데 말이 엎어지면서 방죽이 뒤집히듯이 땅으로 무너져 내렸고 그 때문에 말이 볼기짝을 물자 그 여인은 예의를 차릴 수 없는 꼴사나운 모양이 되었고 여인네들은 말을 세우고 몹시 놀라서 탄식하고 있었다. 정오에는 태인현(泰仁縣)의 길가 집에서 쉬었다. 주인 할미가 방으로 맞이해 들이고는 술이 없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 벼 다섯 되로 밥을 지어 말에 타고 있는 사람들에게 먹였다. 아마도 본 고을에 소속된 늙은 관비였던 것 같다. 모시던 사또 심구(沈玖)의 훌륭한 정치와 관가의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서 상세히 말해 주었다. 저녁에 정읍(井邑) 읍내에서 묵었다. 지방관 권이관(權以寬)은 7월에 새로 부임하였는데 정치를 썩 잘한다고 말들 했다. 이날 80리를 갔다.
14일 : 새벽에 길을 떠났다. 흥덕(興德) 땅에서 아침을 먹었다. 흥덕현을 멀지 않게 바라보면서 비가 내리는 것을 무릅쓰고 출발했다. 저녁에 이준(李俊)에게 따로 떨어져서 가도록 지시했다. 이준에게 고창(高敞) 읍내의 아랫마을[下村]에서 묵도록 지시하고 나는 윗마을[上村]에 있는 이득립(李得立)의 집에서 묵었다. 이득립은 나이가 예순이 다 되어 갔지만 순박하고 정직했다. 한 방에 같이 앉아서 고창현에 관계된 사항들을 자세히 물었다. 득립은 전후 현감들의 정치 상황을 매우 상세하고 분명하게 줄줄이 이야기했다. 곧바로 현임 현감의 정치에 대해서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1588년(선조 21년)생으로 위로는 팔순의 노친이 계시고 아래로는 다섯 명의 아들이 있습니다. 정말로 복받은 사람이지요. 별달리 백성들을 수탈한 일은 없습니다만 하루도 술에 취하지 않는 날이 없고 취했을 때는 전혀 일을 돌보지 않습니다. 실수를 저지르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요. 요즘은 황달 증상이 있어서 많이 마시지는 못합니다.” 해가 지자 그의 아들 신길(信吉)이 공관에서 돌아왔다. 연락해서 오도록 하여 밤늦도록 이야기했는데 말하는 내용이 그의 아버지와 꼭 같았다. 내가 상세하게 묻자 신길은 질문에 바로바로 대답하다가 끝에 가서는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는지 갑자기 사또를 칭찬했다. 그러고는 혹시 암행어사가 다닌다는 말을 들었는데 진짜인지를 물었다. 전주에 왔을 때 나도 들었는데 정말인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신길이 말했다. “우리 사또의 자제가 연지동(蓮地洞)에 살고 있는데 며칠 전에 사람을 보내 알려오기를 ‘대간(臺諫)들의 보고서에 의하면 어사의 행장을 차리라는 명령이 있었다고들 합니다’라고 했고 오늘 아침에 옥구 현감(沃溝縣監)이 우리 사또에게 편지를 보내 어사가 만경(萬頃)에 당도해서 며칠 동안 경내에서 나가지 않고 있어서 만경 사또가 움츠려서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알려 왔습니다.”
15일 : 새벽에 길을 나서 고창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집주인이 하는 말이 간밤에 들었던 내용과 다르지 않았다. 서리(書吏)가 밤부터 아침까지 들었던 내용도 대동소이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비를 만났다. 흥덕에 도착해서 길가의 집에 들어가 말을 쉬게 하였다. 고창현에서 10리 떨어진 거리였는데도 고창 사또에 대해서 곧잘 말했다. 날이 저물자 정읍으로 들어갔다. 어두워진 후에 서리(書吏)를 보내 정읍 사또에게 식량을 받아왔다. 사또가 관아의 노비를 거느리고 걸어와서 밤에 이야기를 나누었다.


16일 : 새벽에 길을 떠나 30리를 가서 영은사(靈隱寺)에서 아침밥을 먹었는데 정읍 땅이었다. 매우 그윽하고 후미진 곳이라 계곡을 따라 작은 사찰이 5, 6개요 칸수도 무려 70, 80칸이나 되었다. 밥을 먹고 나니 눈보라가 세게 몰아쳤다. 험준한 고개 이름이 갈현(曷峴)이라고 했다. 중간 봉우리에 도착하고는 짐을 풀어놓고 고개를 넘었다. 나도 말에서 내려 걸어서 지나갔다. 순창(淳昌) 땅의 점촌(店村)에서 말을 쉬게 했다. 눈보라를 무릅쓰고 길을 나서 다시 험준한 고개를 넘었다. 서리(書吏)와는 따로 길을 갔다. 담양(潭陽)의 점사(店舍)에서 묵었다. 부사(府使)의 정치에 대해서 물었더니 해를 입히지도 않고 칭송하는 소리도 없다고 말했다.
17일 : 날이 밝자 길을 나섰다. 담양에서 아침을 먹었다. 집주인은 한효신(韓孝信)으로 나이 어린 임시직 아전[假吏]이었다. 모시는 사또의 세밀하고 명철함을 이야기하였고 늦게 나왔다가 일찍 들어간다고 칭송했다. 질문과 답변이 꽤 오래 계속되자 갑자기 의심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의심하는 듯한 표정을 보고는 질문을 그만두었다. 밥을 먹고 난 후 길을 떠나 창평(昌平)으로 향했다. 길에서 서리와 서로를 잃어버렸다. 소대(小帶)를 보내 찾아보게 하고 나는 역졸 한 명과 함께 길을 나섰다. 길가에 몇 사람이 바위에 의지해 눈을 피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도 마찬가지로 말에서 내려앉으며 담뱃대와 담배를 꺼내 들었다. 그 중의 한 양반도 담배를 피우려고 하여 같이 한 대를 피웠다. 그러면서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창평 사람이었다. 두 고을의 사또에 대하여 누가 나은지를 물었더니 ‘창평 사또가 낫고 담양 사또는 못하다’라고 했다. 꼬치꼬치 자세하게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담양 사또는 부적격한 사람이다. 작년 겨울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는데 그의 마음은 명성만 못하고 정치도 좋지 못한 부분이 많다. 한정(閑丁 : 군역에서 면제되는 젊은이)을 선발할 때 조금도 융통성이 없었기 때문에 양반들이 많이 원망하고 있다.” 그 사람들이 가고 난 후 나는 혼자서 소대(小帶)를 기다리고 있는데 노인 한 명이 말을 타고 소를 끌며 지나가다가 갑자기 말에서 내리더니 담배를 피웠다. 가슴과 배에 통증을 느끼더니 품속에서 와편(瓦片)을 꺼내 불로 뜸을 뜨고는 품속에 갈무리해서 넣었다. 내가 담배를 권했더니 그 사람은 다시 한 대를 피웠다. 그러면서 어디 사는지를 물었더니 순창 사람으로 해남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순창 사또의 정치에 대해서 물었더니 훌륭한 정치를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담소하다가 또 담양 사또는 어떤지에 대해서 물었더니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이 나라에 살면 그 대부들을 비방하지 않는다’고 했소. 담양이 비록 내가 사는 고을은 아니지만 경계를 대고 있는 이웃 고을인데, 어떻게 곧바로 아무렇게나 말할 수 있겠소?”라고 했다. 나는 “당신은 글을 읽을 줄 아는군요. 선비가 아니십니까?”라고 물었더니 그 사람이 말했다. “그렇소. 향교의 학생으로 젊을 때는 글을 배웠지만 나이가 들고 나서 향교에서 나왔다오. 집안이 가난해서 한 명의 노비도 없고 직접 농사를 짓고 있소.” 이름을 물었더니 성구소(成九韶)였다. 다시 담양 사또의 정치에 대해서 물었더니 이번에도 명확하게 말하지 않고 다만 “정치하는 사람들이 크게 훌륭하거나 크게 나빠야만 이웃 사람들이 다 알게 되오. 내가 어떻게 이웃 고을 수령의 정치에 대해서 알겠소?”라고만 했다. 소대가 돌아왔지만 서리를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창평 땅에서 묵었다. 그 집주인은 매우 선량한 사람이었다. 그의 동생 중에 스님이 된 사람이 있었는데 이름이 설헌(雪軒)이었다. 자기 어머니를 뵙기 위해 그곳에 와 있었지만 창평의 단봉사(端峯寺)에 거주하고 있었다. 나이는 계해생이었고 눈동자가 맑고 눈썹이 수려하였다. 생강과자 한 그릇을 차려와서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하면서 잠시나마 나그네의 회포를 풀었다.



18일 : 새벽에 옆 방향인 나주(羅州)를 향해 길을 나섰다. 대야(大野)를 지나 다시 소대를 보내 서리를 찾아보게 하였다. 그와 만날 수 있었다. 윗마을[上村]에서 아침을 먹도록 지시하고 나는 아랫마을[下村]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창평 땅이었다. 길을 나섰다가 길에서 담양의 아전을 만났는데 어제 아침 먹을 때의 집주인인 한효신(韓孝信)의 동생이었다. 말에서 내려 인사하면서 말했다. “어제 듣기로는 옥과(玉果)로 간다고 하시더니 어떻게 이쪽으로 오셨습니까? 나주로 가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물었다. “자네는 어디로 가고 있나?” 그가 말했다. “나주 사또가 그만두고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저는 나리 편에 편지를 보내 인사나 하려고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광주(光州) 땅에서 말을 쉬게 하였고 날이 저물자 나주에 있는 박산촌(朴山村)으로 들어갔다. 보덕(輔德) 양장경(梁長卿)의 집이다. 문 밖에서 말에서 내렸다. 장경은 창에 기댄 채 앉아 있었다. 내가 곧바로 들어갔는데도 장경은 알아채지 못했다. 문에 들어가 손을 잡자 그때서야 나를 알아보고 “자네 왔는가?”라고 말하고는 기쁜 표정으로 손을 꼭 잡았다. 곧바로 같이 잠자리에 들어 밤이 반이나 지날 때까지 이야기하였다.
19일 : 새벽에 일어나 서둘러 길을 나서려는데 장경이 큰 잔으로 술을 권했다. 길을 나서 선암(仙巖)으로 말을 몰아 들어갔다. 청암(靑巖)에 소속된 역이었다. 바로 말을 교체하였다. 솔마두는 생이(生伊), 마부는 정립(貞立)ㆍ신립(信立)ㆍ복지(卜只) 등이었다. 광주(光州)를 향해 길을 나섰다. 서문을 통해 밖으로 나와 광주를 통과하였다. 남성(南城) 밖에서 말을 쉬게 하였다. 무등산(無等山) 봉우리를 돌아보았다. 울창한 수풀 아래가 증심사(證心寺)였다. 어린 시절 책을 읽던 곳이다. 여기서 5리 정도의 거리에 있지만 들어가 볼 수 없었다. 날이 저물자 화순현(和順縣)의 읍 근처로 들어갔다. 현감(縣監)은 명하(命夏) 홍대우(洪大雨)이다. 어두워진 후 편지를 보내 양식을 요청하였다. 대우(大雨) 역시 만나러 왔다.
20일 : 새벽에 길을 나서 능주(綾州)를 지나 10리 밖 촌사(村舍)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저녁에 높은 산을 넘어 점촌(店村)으로 들어갔다. 바로 보성(寶城) 땅이다.
21일 : 새벽에 길을 나섰다. 안개가 많이 끼어서 바로 앞도 보이지 않았다. 한 촌가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정오에는 길가에서 쉬었다. 큰 고개를 넘어 날이 어두워져서야 장흥(長興) 동쪽 성문에 도착했는데 문이 닫혀서 들어갈 수 없었다. 문득 땔감을 싣고 가는 한 아이가 보여서 물었더니 심문징(沈文徵)의 노비였다. 진주(晉州)의 성(成) 진사(進士)라고 문징에게 말을 전하게 하였다. 문징이 그의 우두머리 노비를 보내서 문을 열어주게 하였다. 들어가서 문징을 만났다. 문징은 섬돌을 내려와 맞이하며 손을 잡으며 곡을 했다. 마주 앉아 슬퍼하고 기뻐하며 밤이 반이나 지나도록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그의 아들인 진사(進士) 심유(沈攸)도 함께 자리했다.
22일 : 새벽에 길을 떠나려 하였는데 문징이 술을 권했다. 몇 잔을 기울이고 나서야 작별하였다. 서리(書吏)와 복마(卜馬)를 잃어버렸다. 산 위에 혼자 앉아서 생이(生伊)에게 달려가서 보성(寶城)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을 찾아보라고 했다. 한 작은 촌락에서 아침을 먹었다. 서리와는 다른 길로 가고 있었다. 차가운 비가 쏟아졌다. 길가의 큰 마을에 들어가 비를 피했다. 비가 잦아지자 길을 떠났다. 비가 다시 내렸다. 나는 도롱이를 입었지만 생이(生伊)와 정립(貞立) 등은 옷이 흠뻑 젖었다. 길가의 마을로 들어갔다. 예전에 내가 이 길을 지나갈 때 묵었던 촌락이다.



23일 : 새벽에 길을 나서 조령원(鳥嶺院) 옆에서 아침을 먹었다. 어제 아침에 서리(書吏)와 헤어진 뒤 아직 만나지 못했다. 밥을 먹은 후 길을 나섰다. 흥양(興陽)과 낙안(樂安)의 갈림길에 도착했다. 산기슭에 앉아서 생이(生伊)에게 가서 서리가 간 곳을 알아보라고 지시하였다. 해가 중천에 있을 때쯤 돌아와서 “길가는 사람들 모두가 모른다고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오후에 낙안에서 오는 한 노인을 만나 물어보니 그런 사람을 고개 위에서 만났다고 했다. 생이를 급히 보내 쫓아가게 하였다. 정립과 같이 복마(卜馬)에 타고 길을 떠나 낙승역(樂承驛) 근처에 도착했을 때 해가 지려 하였는데 멍하니 갈 곳을 알 수 없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생이가 돌아와서 말했다. “길가는 사람들이 모두 그 사람은 이미 순천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급히 쫓아갔지만 만날 수 없어서 돌아왔습니다.” 곧바로 길가에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주인 여자가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를 뿐만 아니라 목소리와 안색에서마저 모두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역졸(驛卒)이 부엌 옆에다 불을 피웠다. 주인 남자가 밖에서 돌아왔는데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 “너는 누군데 여인네 옆에 앉아 있는 것이냐. 이렇게 무례하니 뺨을 맞아야겠다.” 생이가 황급히 일어나며 막았다. 내가 온갖 방법으로 애걸하여 겨우 무사했다. 밤이 되었는데도 불도 없이 마당가의 멍석에 앉아 있었다. 여행객과 장사치 4명이 역시 그 집에 들어와 있었는데 우리와 뒤섞여 앉아 있었다. 여행객들이 우리가 밥도 먹지 못하고 있는 것을 불쌍하게 생각해 주인에게 간청하였다. 주인이 그제서야 밥을 지어 주었고 오래 전에 폐가가 된 작은 집에 들어가서 유숙하도록 해주었지만 추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24일 : 새벽에 조령원(鳥嶺院)으로 돌아가는 방향으로 길을 나섰다. 황극해(黃克諧)의 집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그의 두 아들 황석준(黃錫俊)ㆍ석영(錫英) 형제가 나와서 기다렸다. 밥을 먹고 흥양(興陽) 쪽으로 출발했다. 정오에 길가의 바닷가 마을에서 쉬었다. 사또의 정치와 바닷가 백성들의 비탄과 고통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저녁에 양강역(陽江驛)을 지나 촌가(村家)에 유숙했다. 주인이 덕망 있는 사람이었다.
25일 : 새벽에 출발하여 송산로(松山路)를 따라 옆으로 이동했다. 서얼(庶孼)의 집에서 아침을 먹었고 정오에 현 안에서 쉬었다. 저녁에 현에서 40리 되는 곳에서 묵었다. 사또가 지금 양강의 창고[陽江倉]에서 환곡을 걷고 있었기 때문에 나올 수 없었다.
26일 : 아침에 양강역에 도착해 보니 사또가 바로 전에 다른 창고로 출발하고 없었다. 역에서 아침밥을 먹고 말을 교체하였다. 세찬 바람을 무릅쓰고 낙안 땅의 낙승역(樂勝驛)으로 들어갔다. 역졸이 다과를 차려 내었다.
27일 : 아침을 먹은 후 순천(順天)으로 향했다. 정오에 서원(書院)에 도착했다.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을 모신 서원이다. 서원의 유생(儒生) 허빈(許彬)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역인(驛人)에게 관아로 가서 부사에게 나와서 맞이하라는 뜻을 전하게 하고는 곧바로 성안의 마을로 들어갔다. 부사 김종일(金宗一, 호는 貫之)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동헌(東軒)에서 묵었다.
28일 : 객사로 갔다. 일정을 알리는 공문을 보냈다. 허생(許生)을 맞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리가 비로소 도착했다. 서로 헤어진 지 7일째였다. 저녁에 부사(府使)가 만나러 왔다. 객사는 오랫동안 불을 지피지 않아서 다시 동헌으로 와서 묵었다.
29일 : 민응신(閔應信)을 불러서 만났다. 인보(寅甫)의 서얼 동생이다. 저녁에 객사에서 묵었다. 부사가 만나러 왔다.


30일 : 아침에 부사가 보러 왔다. 밥을 먹은 후 길을 나섰다. 정오에 참소(站所)에서 쉬었는데 순천 땅이었지만 순천부에서 25리 떨어진 곳이었다. 저녁 때 배로 낙수(洛水)를 건넜다. 구례(求禮)에서 마중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해가 진 후에 들어가 묵었다. 구례 사또 이경후(李慶厚)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고 곡성 현감(谷城縣監) 이문주(李文柱)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12월 1일 : 날이 밝자 길을 나섰다. 10리도 못 가서 남원(南原) 땅이었다. 마중하는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데 성현(星峴)을 넘어가 묵었다. 눈이 오는데도 불구하고 원천(元川)으로 들어갔다. 부사(府使) 송흥주(宋興周)가 와서 마중하였고 진사 조경남(趙慶男)의 집에 자리를 마련하였다. 조 진사는 내가 어렸을 때 송림사(松林寺)에서 학제(學製 : 학제는 원래 四學合製의 줄임말로 성균관의 대사성이 한양의 중ㆍ동ㆍ남ㆍ서의 유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던 製述試驗과 講學試驗을 일컫는 말이다. 여기서는 제술과 강학 과목을 가르친다는 정도의 의미인 듯하다-역자 주)를 하던 사람이었다. 기묘년(1639년, 인조 17년)에 남원을 암행할 때만 해도 진사께서 생존해 계셔서 광한루에서 함께 묵었는데 지금은 돌아가시고 그의 첩의 아들인 조목(趙牧) 등 형제가 나와서 인사하였다. 남원부의 사람이 차를 가져와서 먹었고 조목의 집으로 보냈다. 오후에 눈보라가 거세게 일어 바로 앞도 분간할 수 없었다. 그래도 길을 나서 어렵게 광한루에 도착했다. 늙은 기생[老妓] 여진(女眞)과 늙은 아전[老吏] 강경남(姜敬男)이 와서 인사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기생들을 모두 내보내고 시중드는 동자만 데리고 서리(書吏)와 함께 광한루 난간에 나와 앉았다. 온 들판이 눈빛이며 대나무 숲도 모두 흰빛이다.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2일 : 아침에 남원 부사(南原府使)를 만나 이야기하였고 밥을 먹은 후 길을 나섰다. 정오에 오수역(獒樹驛)에서 쉬었다. 찰방 이양복(李陽復)은 차원(差員)으로 나가고 없었다. 호남 방백(湖南方伯 : 전라 감사) 이시해(李時楷)ㆍ전주 부윤(全州府尹) 박황(朴潢)ㆍ판관(判官) 신홍망(申弘望)이 편지를 보내 안부를 전했다. 저녁에 임실(任實)에서 묵었다. 현감 조구석(趙龜錫)은 휴가 중이었고 순창 군수(淳昌郡守) 민응경(閔應慶)이 직무를 겸직하였는데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3일 : 아침밥을 먹은 후 길을 나섰다. 정오에 상상동(上上洞) 참원(站院)에서 쉬었다. 오후에 전주를 거쳐가면서 혼자 한벽당(寒碧堂)에 올라가 잠시 있다가 성안으로 말을 몰아 갔고 곧바로 전라 감사의 감영으로 들어갔다. 전주 부윤을 만나 마주앉아서 이야기하였다. 해가 지자 관아의 별채[二衙]로 가서 판관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부윤이 다시 왔고 밤이 되어서야 관아로 돌아갔다. 도사(都事) 이순암(李純?)의 어린 딸 훈(熏)이 보러 왔다.
4일 : 머물렀다. 아침에 부윤의 거처로 갔다. 지평(持平) 이기발(李起?)과 정담을 나누는데 판관이 찾아와서 함께 자리했다. 오후에 방백이 오자 지평과 판관은 일어나 나갔다. 저녁을 먹은 후 숙소로 돌아갔다. 경기 전 참봉(慶基殿參奉) 채충립(蔡忠立)이 만나러 왔는데 원보(元甫)의 동생이고 백창(伯昌)의 삼촌이다.
5일 : 새벽에 일어나 길을 나서려는데 부윤이 왔다. 판관과 몇 잔의 술을 같이 한 후 작별하였다. 삼례(參禮)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찰방 방원정(房元井)이 마중 나왔다. 정오에 여산(礪山)에서 쉬었다. 군수 허자(許?)가 마중 나왔다. 저녁에 눈이 오는 것을 무릅쓰고 은진(恩津)으로 들어갔다. 현감 민진관(閔震寬)이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성환 찰방(成歡察訪) 장여간(張汝?)이 달려왔다.
6일 : 정오에 이산(尼山)에서 쉬었다. 저녁에 공산(公山)으로 들어갔다. 현감 신택(申澤)이 마중하였다. 방백 조계원(趙啓遠)이 보러 왔다. 밤에 현감과 늦도록 이야기하였다.



7일 : 일찍 아침을 먹고 산성(山城)으로 가서 방백을 만났다. 배로 금강(錦江)을 건너 정오에 광정(廣亭)에서 쉬었다. 저녁에 천안(天安)서 묵었다. 군수 박순의(朴純義)가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찰방도 와서 마주 앉아 이야기하였다.
8일 : 일찍 길을 나섰다. 성환에서 아침을 먹었다. 직산 현감(稷山縣監) 김시진(金始振)이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에 진위(振威)에서 묵었다. 현감은 관아에 없었다.
9일 : 일찍 길을 나섰다. 수원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수원 아전 출신 차승중(車承重)을 불렀다. 날이 저물자 과천(果川)으로 들어갔다. 현감 구숙신(具玉肅新)은 그만두었다. 차승중에게 보고서[書啓]를 옮겨 적도록 지시하였다.
10일 : 아침에 보고서를 다 쓴 후 출발하였다. 얼어붙은 한강을 동작(凍雀)에서 건넜다. 오후에 대궐에 들어가 보고하고 보고서를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