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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기록청백리가 된 암행어사 성이성(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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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가 된 암행어사 성이성(1편)

1637년(인조 15), 1639년(인조 17), 1647년(인조 25)
호남 암행어사 성이성(1595-1664)


소년 시절, 남원에서 성장한 성이성은 명민하면서도 활달한 성격으로 스승 조경남의 총애를 받는다. 그의 깊은 가르침으로 '실천하는 지식인'의 기틀을 닦은 성이성은 인조 임금의 신임을 받아 세 차례나 호남 암행어사로 임명된다.






성이성이 태어난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 나라가 혼란스럽던 1595년이었습니다. 온 나라가 왜국에서 조총으로 무장한 병사들 때문에 고생이 막심하던 시절이었지요. 나중에 성이성은 41세 되던 1636년에 청나라의 침입을 받는 병자호란을 겪었으니 조선시대 500년에 걸쳐 가장 큰 전쟁 두 가지를 다 치른 셈입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겉으로는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이 때부터 성이성은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책 읽다 말고 어딜 그리 쏘다녔더냐?"
스승인 조경남(趙慶男)이 짐짓 엄한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광한루에 다녀왔습니다."
이제 갓 소년 티를 벗기 시작한 성이성이 맑은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공부할 시간에 그렇게 놀러나 다니라고 가르쳤더냐?"
"선비가 되어 바깥 세상에 어두우면 평생 책상물림밖에 못 된다고 배웠습니다."
성이성의 대답에 스승은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만 그 바깥 세상이란 게 꼭 광한루인 까닭은 무어냐?"
스승의 날카로운 질문에 성이성은 움찔했습니다.
스승 조경남은 이제 사춘기로 접어든 성이성이 요즘 부쩍 광한루를 자주 찾아가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남원 고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그 경치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얼마 전 성이성은 그곳에서 아리따운 기생을 본 뒤 남몰래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눈 밝은 스승 조경남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생이라 해서 아무 사내에게나 마음을 주지는 않는 법이다. 먼저 속이 꽉 차고 뜻이 곧은 사내가 되거라."
이렇게 말하면서 스승은 붓을 들어 쓰다만 글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스승님, 지금 쓰시는 글에 대해서 여쭙고 싶습니다. 어떤 글인지요?"
"그저 잡스런 글일 뿐이다. 난리 때 보고 들었던 이야기를 재미 삼아 적어 보는 것이다."
스승은 붓끝에 시선을 둔 채 예사롭게 대답했습니다.
성이성은 스승의 붓놀림을 한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사대부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글 솜씨가 뛰어났던 스승은 무인이면서도 글쓰기를 무척 즐겼습니다. 성이성은 그런 스승이 자랑스러웠습니다. 그저 책만 읽는 다른 선비들과는 달리 스승은 강인한 육체와 학문의 깊이가 조화를 이루는 사람이었습니다.
"내 오늘은 너에게 좋은 시 한 편을 들려주마."
갑자기 붓을 내려놓더니 스승이 입을 열었습니다.
"어떤 시입니까?"
"명나라 사신이었던 조도사란 사람에게서 전해들은 시이니라. 들어보거라."
스승이 읊은 시는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淸香旨酒千人血 청향지주 천인혈 (맑은 향기 맛있는 술은 천 사람의 피요)
細切珍羞萬姓膏 세절진수 만성고 (곱게 썬 진귀한 안주는 만 백성의 기름이라)
燭淚落時民淚落 촉루낙시 민루낙 (촛농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歌聲高處怨聲高 가성고처 원성고 (노래 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높더라)

성이성은 스승이 시를 읊는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자, 어떤 생각이 드느냐?"
스승이 물었습니다.
"두렵고도 힘이 넘칩니다."
"두려운 건 무슨 까닭이며 힘이 넘친다는 것 또 무슨 뜻이냐?"
"백성을 해치는 탐관오리의 악행이 두렵고, 원망이 극에 달해 마침내 터질 것 같은 백성들에게서 어떤 대단한 힘이 느껴집니다."
성이성의 대답에 스승은 슬며시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한 편의 시가 비록 준엄한 뜻을 지니긴 했지만, 저 혼자 대숲에 숨어 읊어대기만 한다면 이런 시는 나약한 시가 될 것이다. 허나 탐관오리들 앞에 서서 이런 시를 당당하게 읊을 수 있다면 이 시는 본래 힘을 찾게 되겠지. 허나 그런 용기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
스승은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선조의 난리 때 남원의 의병장이 되어 활약했던 스승 조경남은 광해군이 즉위하면서부터 정치판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멀리해 왔습니다. 강직하면서도 의리와 도덕이 드높은 그는 전국적으로 벌어지는 탐관오리들의 악행을 늘 한탄하곤 했습니다.
그런 스승을 바라보는 성이성의 눈에는 언제나 오기와 힘이 실려있었습니다.
'스승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언젠가 제가 벼슬을 하게 되면 반드시 스승님의 높고 맑은 뜻을 따르겠습니다."
성이성은 그런 생각을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마음에 새겨두곤 했습니다.

남원부사 성안의(成安義)의 아들인 성이성이 아버지를 따라 이곳으로 내려온 지도 벌써 5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선정을 베풀어 비교적 오래 머물렀던 것이지만 이제 떠날 때가 다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 성이성은 이곳 남원에서 소년기를 보내며 스승 조경남으로부터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학문은 물론이거니와 선비의 도리와 사내로서의 육체적인 힘, 그리고 의리와 용기 등등,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이미 16세의 나이에 진사가 된 그는 주위로부터 크게 될 인물이라는 소리도 자주 들었습니다.
또 성이성은 남모르게 어여쁜 소녀 기생을 만나 사춘기 시절의 가슴 풋풋한 낭만도 느껴보았습니다. 성이성에게는 이 모든 것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했습니다.

광해군 3년인 1611년, 17살의 청년이 된 성이성은 드디어 남원 땅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성안의가 광주목사로 임명되어 자리를 옮겨야 했던 것입니다.
떠나던 날 성이성은 스승 앞에 무릎꿇고 앉아 이별을 아쉬워했습니다.
"언제나 몸과 마음을 튼튼하게 가꾸도록 하거라."
스승 조경남이 성이성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자주 찾아 뵙겠습니다."
"자주 찾아온다는 것은 할 일이 없다는 뜻이다. 나는 네가 빈둥거리며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큰일을 하며 바쁘게 살거라. 자주 찾아올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고."
성이성은 눈물을 흘리며 스승과 헤어졌습니다.
이후 남원으로 자리를 옮긴 성이성은 스승의 뜻을 어기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리하여 1627년, 그의 나이 33살 되던 해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부터 사헌부, 홍문관 등 삼사의 중요한 벼슬을 거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바른 말을 곧잘 하는 바람에 승진할 기회를 자주 놓치곤 했습니다. 여러 신하들로부터 시기를 받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인조 임금은 성이성를 세 차례나 암행어사로 임명할 정도로 그의 강직한 성품을 인정했습니다.
1636년은 바로 병자호란이 일어난 해입니다. 조선은 청나라에 굴복하는 치욕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더 고생했을 백성들을 위로하고, 이런 혼란 중에 나라를 어지럽히는 수령들을 그냥 놔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조 임금 15년이 되던 해인 1637년 왕은 성이성에게 특별히 호남 암행어사가 되어 둘러보라고 명령했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병자호란이 지나간 후 흉년까지 겹쳐 백성들의 생활이 더없이 비참할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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